우리는 무엇을 '원인'이라 부르는가
우리는 더 이상 번개를 신의 분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압의 차이와 전하의 이동이라는 명백한 물리적 원인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대인은 인간의 심연에 도사린 허무를 '인지적 오류'나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으로 설명하고, 전쟁을 '자원 분배의 실패'와 '집단 이기주의'의 산물로 분석한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모든 현상에 이토록 명백한 원인이 존재하는데, 왜 굳이 '신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막연한 신학적 원인을 끌어들여야 하는가? 우리가 인지적 한계 때문에 원인을 못 찾는 게 아니라, 신학이 이미 밝혀진 원인들을 무시하고 '신비'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과학과 사회학은 현상이 일어나는 '어떻게(Mechanism)'를 설명하는 데 탁월하다. 허무함이 뇌의 어느 부위에서 일어나는지, 전쟁이 어떤 경제적 지표 때문에 발발했는지는 데이터로 증명 가능하다.
하지만 기독교가 말하는 위계와 질서의 문제는 '왜(Significance)'에 천착한다. 뇌세포의 반응이라는 원인을 안다고 해서 "내 삶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실존적 허무가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는다는 지점이다. 신학은 이 '이유 없음' 혹은 '설명되지 않는 갈증' 자체를 창조주라는 원형에서 떨어져 나온 피조물의 근원적 상태로 해석한다. 즉, 심리학적 원인이 '현상'이라면, 신학적 원인은 그 현상을 일으키는 '근원적 토양'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흔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이나 고통을 마주할 때 이를 신의 뜻이나 인간의 죄로 돌리며 인지적 편안함을 얻으려 한다. 이는 분명 인류가 오랜 시간 사용해온 심리적 방어기제다.
그러나 기독교의 논리는 이를 뒤집는다. 인간이 모든 원인을 다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이성의 오만'이야말로 창조주와의 위계를 망각한 증거라고 본다. 모든 것을 인지적 범위 안으로 끌어들여 통제하려는 시도가 도리어 인간을 더 큰 불안(자아의 분열)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절대적 위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내 지성이 온 우주의 인과관계를 다 담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겸손의 체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현대의 학문은 인간을 세포로, 심리로, 사회적 동물로 잘게 쪼개어 분석한다. 각 분야는 명백한 원인을 내놓지만, 정작 '나'라는 전체 인격이 느끼는 통합적인 분열은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다.
기독교적 위계가 제안하는 증명은 '통합'에 있다. 쪼개진 원인들을 하나하나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의 관계'라는 최상위 노드(Node)를 정렬했을 때 하위의 모든 심리적·사회적 문제들이 제자리를 찾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수만 가지 오류를 일일이 고치기보다 OS를 재설치했을 때 모든 기능이 정상화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인류는 끊임없이 고통의 원인을 규명해 왔고, 그 덕분에 많은 비극을 막아 세웠다. 그것은 위대한 진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명백한 원인 분석표를 손에 쥐고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인지적 변수'로 볼 것인지, 아니면 '창조주만이 채울 수 있는 절대적 빈자리'로 볼 것인지는 결국 세계관의 선택이다. 전자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길이고, 후자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며 절대적 질서에 몸을 맡기는 길이다. 당신은 어느 쪽의 원인이 더 '실재'에 가깝다고 느끼는가.
#생각번호2026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