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타인을 단죄하는 지독한 방식
가끔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 가두어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가 나에게 보여준 한 조각의 악의가 그의 본질 전체인 양 확신하며, 그를 '본래 그런 인간'으로 명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에 대한 정당방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알랭 드 보통이 말한 '낭만적 테러리즘'의 변주에 가깝다.
낭만적 테러리즘은 보통 사랑하는 관계에서 '상대가 내 마음을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기대가 어긋날 때 발생한다. 내가 상처받았으니 당신은 가해자이고, 나를 아프게 했으니 당신은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이다. 상대의 복잡한 맥락과 그날의 사정, 그가 가진 내면의 취약함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저 나를 아프게 했다는 결과 하나로 그 사람의 전 생애를 '나쁨'으로 색칠해버린다.
이러한 명명은 일종의 게으름이다. 한 인간이 가진 입체성을 들여다보는 수고를 생략하고, '악인'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내 마음 밖으로 추방해버리는 것이 훨씬 명쾌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이 되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그 수식어가 얼마나 억울하고 단편적인지 금세 알 수 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겐 가해자였겠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었듯이 말이다.
철학이 '본질'을 규명하려 애쓴다면, 문학은 그 본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가변적인지를 증명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선과 악의 경계에서 서성인다. 명백히 나쁜 짓을 저지른 인물조차 그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왜 그 시점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지점이 발생한다.
문학은 우리에게 '나쁜 사람'이라는 명사 대신 '나쁜 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라는 형용사적 이해를 권한다. 누군가를 본질적으로 나쁘다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 사이의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은 영원히 차단된다. 그것은 상대를 죽이는 테러이자, 내 세계를 좁히는 고립이기도 하다.
결국 타인이 나에게 준 상처를 다루는 가장 성숙한 방법은, 그에게 부여한 '본질적 악함'이라는 진단명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 순간 나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던 서툰 존재일 뿐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위치에서 도덕적 우월감을 누리며 상대를 테러하는 것이 훨씬 달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과학적 분석보다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한 문장의 이해가, '그는 원래 나쁘다'는 백 권의 판결문보다 내 영혼을 더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생각번호2026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