탓하는 마음과 직면하는 마음 사이

'책임의 재배치'

by 민진성 mola mola

나는 지금 비겁한 변명을 하고 있는 걸까?

상담이 거듭될수록, 그리고 내 증상들을 CPTSD나 양극성 장애라는 틀 안에서 명확히 인지할수록 묘한 부채감이 찾아오곤 한다. 내 삶의 모든 굴곡을 환경의 탓으로, 혹은 병리적인 뇌의 오작동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다. '어쩔 수 없었어'라는 문장 뒤로 숨어버리는 비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할수록, 이 '찝찝한 기분'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죄책감의 자리에 들어선 '객관적 인과관계'

하지만 냉정하게 짚어보자면, 이것은 남 탓을 하기 위한 회피가 아니라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한 **'해체 작업'**에 가깝다. 엉킨 실을 보며 "내 손이 서툴러서 그래"라고 자책만 하는 것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대신 "실의 재질이 본래 마찰에 약하고, 외부 습도가 너무 높아서 엉킨 거야"라고 분석하는 순간, 비로소 실을 풀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나온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환경과 물려받은 기질을 인지하는 것은, 나를 공격하던 죄책감을 거두고 그 자리에 '인과관계'라는 객관적인 지도를 펼치는 일이다.



원인은 나의 것이 아니나, 회복은 나의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원인'과 '책임'의 분리라고 부른다. 내가 자라온 환경과 내 신경계가 반응하는 방식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의 '탓'이 아니다. 하지만 그 상처를 인지한 시점부터, 이 삶을 어떻게 수선하고 가꾸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회복의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으로 남는다. 내가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고, 고통스러운 과거를 들춰내며 병명을 공부하는 이 모든 성실함은, 사실 내 삶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가장 강력한 주체적 행동이다.



피해자라는 박제를 넘어, 관리자라는 이름으로

원인을 환경과 병리로 돌리는 것은 나를 영원한 '피해자'로 박제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죄책감으로부터 나를 '방면'해주기 위함이다. "내 성격이 이상해서"라고 생각할 때는 출구가 없었지만, "내 안의 양극성 장애 기제가 작동 중이구나"라고 인지하는 순간 나는 내 상태를 조절할 수 있는 '관리자'가 된다. 전두엽의 차가운 분석력이 변연계의 뜨거운 불안을 관찰하기 시작할 때, 나는 비로소 감정의 노예가 아닌 내 삶의 주인이 된다.



비로소 쥐게 된 삶의 주도권

결국 모든 것을 환경과 병리 탓으로 돌리는 것만 같은 그 기분은, 역설적으로 내가 얼마나 내 삶을 잘 이끌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나는 이제 '무지'라는 감옥에서 나와 '인지'라는 도구를 들었다. 원인을 정확히 아는 것은 변명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나는 오늘도 내 아픔에 이름을 붙이고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이 과정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상처 입은 나를 온전히 책임지는 성숙한 독립이기 때문이다.





#생각번호20260205

이전 29화위로보다 강력한 치유, '정확한 인지'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