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원래 여행은 비행기 탈 때가 제일 행복해

에어프레미아 타고 LA로

by 솔빛

11살, 8살 두 딸을 데리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52일간의 일정이다. LA 여행 9일, 샌디에이고 스쿨링 6주를 계획했다. 남편 없이 홀로 어린 두 딸아이를 데리고 제주도도 아닌 자그마치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하는 길. 자유로움과 외로움, 불안함과 설렘 같은 양가감정들을 느꼈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다크초콜릿 같달까. 어쨌든 나는 다크초콜릿을 좋아한다.


무식한 대통령의 권력 남용으로 치솟은 환율 덕에 모두들 밥이나 제대로 사 먹겠냐며 걱정했지만. 미리 큰 건 들, 이를테면 스쿨링 비용과 호텔, 디즈니, 유니버설 입장료, 투어 일정 등 을 예약해 둔 나는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양이 적은 아이들이니 햄버거도 두 개 시켜 셋이 나눠 먹으면 될 일이고, 마트에서 이것저것 사서 데워먹을 수 있는 포트도 미리 준비했다. 이런저런 기념품들은 일절 사지 않을 작정이다. 그때는, 그랬다.


주변의 걱정과 부러운 시선들을 고스란히 받아 감사한 마음을 안고 우리 세 모녀는 곧 헤어질 남편과 함께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가성비 좋기로 유명한 미주 항공사 '에어프레미아'를 찾아가 체크인을 마치고, 아빠와 인사를 나눴다. 어느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14년 차 부부에게 두 달간의 헤어짐은 그리 큰 슬픔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너무 설렜고, 남편도 조금은 아니 당장은 설렜으리라.


보딩 두 시간 전 공항에 도착했지만, 탑승수속에 꽤 시간이 많이 걸려 딱 맞춰 도착했다. 여러 과정들을 진득하게 기다리고, 먼 게이트까지 쫓아오느라 지쳤을 아이들은 비행기 앞에서 목이 마르다고 울상이다. 물 한 모금 안 마시는 아이들이 왜 나오기만 하면 물을 그렇게 찾을까. 평소 같으면 조금만 참으라 했을 테지만, 비행기가 이륙하고도 한참 있다 물이 제공될 것을 알기에 나도 함께 침울해져 버렸다. 다행히 탑승구 바로 옆에 보기만 해도 상큼하고 개운한 잠바주스가 보인다. 게이트 안에서 파는 음료는 비행기 반입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다급한 와중에도 늘 길이 있는 법. 우리 세 모녀의 LA여행도그래 주기를 짧게 소망해 본다.


드디어 비행기에 오른 아이들은 부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륙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약 10분가량을 핸드폰의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뗐다를 반복했다. 비행기가 빨라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내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나도 더 이상 닦달하지 않았다. 조심스레 핸드폰을 쥐어들고, 이륙 순간을 고대하는 아이들이 사실은 너무나 귀여웠고, 이런 시간을 마련한 내가 대견했다. 왜 방학에 미국 학교를 가야 하냐고, 그냥 집에서 쉽고 싶다는 아이들의 항의를 적당히 무시하길 참 잘했구나. 7주는 너무 길지 않냐는 남편과 시댁의 은근한 압박을 너무 담아두지 않기를 잘했구나. 상상초월의 비용이 드는 이 일을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실현시킨 내가 참으로 기특하다. 역시나 다른 여행들도 그랬듯이 이런 벅참과 뿌듯함은 비행기를 탔을 때가 가장 절정이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새로운 세상으로 향한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행복했다. 원래 여행은 비행기에서 가장 행복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언니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동생이 심통을 낼게 뻔하므로 8살임에도 불구하고, 언니가 쓰던 핸드폰을 물려줬다. 물론 모든 애플리케이션과 게임은 금지. 오로지 사진만 가능하도록 세팅해 두었다. 새 핸드폰을 들고, 비행기에 오른 아이의 마음이 어찌 잔잔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이륙 시간을 성공적으로 포착하고 나서야 우리는 또 부산스럽게 각자의 책을 꺼내 들었다. 11시간의 비행시간을 야무지게 보내기 위해 나와 함께 책과 영상을 볼 수 있는 시간과 수학문제를 푸는 시간까지 미리 계획했다. 1시간의 독서를 마친 아이들은 그제야 사이좋게 이어폰을 나눠 끼고, 신나게 패드를 뒤적이며 미리 다운로드하여 둔 영화를 골랐다.


처음 타 본 에어프레미아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코노미 치고는 좌간 간격이 적당했고, (물론 체구가 작은 아이들과 내 기준일 것이다.) 화면에 영화들도 꽤 있어서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시간을 보내기 좋았다. 창문은 이제껏 보지 못한 신식이었다.. 커튼을 치거나 마개를 덮는 게 아니라 조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대표 항공사를 탔을 때보다 아이들이 기내식을 잘 먹어주었고, 승무원 분들도 매우 친절했다. 사실 이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하늘을 날고 있으므로, 새로운 세계를 향하고 있으므로 행복하다.



11시간을 예상했던 비행시간은 9시간 30분으로 줄어들었다. 8시쯤 공항에 도착할 줄 알았던 우리는 아침 6시에 도착해 또 한 번 기나긴 입국심사를 기다렸다. 한국시간으로는 새벽 1시, 낮잠 한숨 안 잔 아이들이 한 시간가량 서서 기다리는 일은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짜잔 하고, 화려한 미국이 반겨줄 줄 알았던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둘이 돌아가며 캐리어에 앉고, 8살인 둘째는 힘이 닿는 데까지 안아도 주기도 하며 버텼다. 이런 내 모습이 짠했는지 뒤에 계신 한국 할머님이 아이 둘을 데리고 대단하다며 나를 칭찬하셨다. 어디서든 누구에게서든 칭찬을 들으면 기운이 난다. 내가 좀 괜찮은 사람이 된 거 같은 마음에 더 있는 힘껏 아이들에게 웃어 보이고, 안아줄 수 있었다. 예상외로 까다로웠던 입국심사까지 완벽하게 마친 우리는 한국이었다면 한참 꿈나라에 가 있을 시간에 LA아침을 맞이하며 미리 예약해 둔 한인 택시에 올랐다.


에어프레미아에 이어 택시 플랫폼인 우버나 리프트를 이용하지 않고, 공항픽업을 예약한 나를 또 한 번 칭찬한 순간이었다. 우버를 타려면 또 셔틀을 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했다면 아이들의 원성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 시간을 달려 호텔에 도착했지만, 너무 이른 아침이라 체크인을 할 수 없었다. 원래 내 계획은 가까운 레이크 할리우드나 다운타운을 들르는 것이었는데, 이 컨디션으로는 불가했다. 하는 수 없이 호텔과 가까운 유니버설 옆 시티워크 안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건, 내가 아는 스타벅스가 아니었다. 테이블이 거의 밖에 있어 앉아서 쉬기가 힘들다는 것.


겨우 주문 후 기다리는 공간에 자리한 간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둘째 꼬맹이는 바로 내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고. 나와 첫째 아이는 함께 구글맵을 들여다보며 내일 일정을 짜기에 바빴다. 의논이라기보다는 내가 미리 서치 해둔 곳들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어때 보이냐며 의견을 묻는 정도기는 했지만 말이다.


'거기 의외로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요. 꼭 가보셔요.'


우리 모녀의 대화를 듣고, 옆에 앉아계신 한국 분이 말을 걸어왔다. 캐나다에서 온 한국인 투어가이드인데, 잠시 일행을 기다리는 중에 우리의 대화를 들으신 것이다. 마침 라라랜드로 유명해진 '엔젤플라이트'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12시간이 채 안 됐지만,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은 역시나 반가웠다. 아이들과 그냥 넘어가지 않고, 알은체를 해주시니 더욱이 감사했다.


몇 달간 달뜬 마음으로 미국행을 준비했다. 비행기에서의 시간은 지겹고 힘들기는커녕 흥분되고, 설렜다. 마침내 맞닥뜨린 LA는 생각보다 추웠고, 하늘은 뿌얬으며 갈 곳은 없고, 카페 의자도 불편하고 모든 게 기대와는 영 딴판이었다. 실망할 틈 없이 가이드님의 관광팁과 조언에 나는 다시 한 껏 LA에 대한 꿈을 부풀렸더랬다. 물론 몇 시간 후 체크인한 호텔은 생각보다 어둡고, 유니버설 스튜디오 외에는 주변에 다닐만한 곳도 없었으며 날은 계속 흐리고 추웠다. 다음 날 방문할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는 더 험난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아마 계속해서 부풀리고, 키워 온 여행에 대한 꿈과 기대 덕에 LA 땅에서 아이들 손을 부여잡고 공기처럼 가볍게 떠다닐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보다 힘겨웠던 LA 관광을 마치고 샌디에이고로 넘어온 지금 그곳은 화염과 연기로 뒤덮이고야 말았다. 힘들었던 만큼 기똥차게 재밌기도 했던 그때가 벌써 아득하다. 연기로 더 아득해진 그곳이 다시 활기를 찾아 시글벅쩍 정신없는 곳으로 하루빨리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서만은 아니다. 원래 여행은 비행기가 가장 행복한 게 맞는 거 같다. 시작부터 부풀려진 기대와 행복감 덕분에 막상 지치고, 속상한 날들을 마주하더라도 기운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보다. 그 기운덕에 좋은 날들만 더 기억나나 보다. LA에서의 기억들을 지금부터 하나씩 꺼내보려 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에 얼른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