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夜에 여러 맛이 난다.

타이베이 그림여행기

by 두더지손
망고여관으로 올라가는 1층 현관문. 아쉽게도 현재는 폐업하였다.

여기는 타이베이에서도 용산사 근처에 있는 망고여관.


망고여관은 타이베이에서 내가 찾을 수 있던 가장 싼 숙소였다. 그래서인지 장기체류자들이 좀 있다.

하루이틀 묵는 사람들도 있지만 뭐 하는지 모르겠으나(나를 포함) 여관에 들어오자마자 이 집의 낡은 계단처럼 익숙해보이는 여행자들이 있다. 자주 마주치지만 그들에게 영어로 말 걸기가 너무 귀찮아, 목례만 가볍게 하고 대화는 안 하고 지내던 어느 날 저녁, 유유자적 침대에서 뒹굴고 있던 밤이었다.

갑자기 어떤 여자가 방으로 들어와 느닷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타이완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참으로 살가운 사람이었다. 영어가 유창한 편이 아닌데도 요 며칠 간 여행한 곳들의 사진을 연신 보여주며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에 여러 맛이 난다.


근처 까르푸에서 산 주스를 먹으러 거실에 올라가니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망고여관에서는 처음 보는 풍경.

싱가포르에서 온 노부부, 매일 전화기만 붙들고 있던 장기체류자, 며칠 전부터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숙소 거실을 지키던 청년, 우리 도미토리 방에 새로 온 귀여운 숏컷, 밤마다 돌아오면 여행자들에게 오늘의 일을 쏟아내던 단발 친구 등등.

각자 가져온 음식을 조금씩 나눠먹으며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나는 어색해서 그들을 피해 빙 돌아가려다 실패, 그만 과일을 얻어먹고 말았다. 아까 방에서 만난 웃음 많던 여자가 마치 이 곳 주인장처럼 사람들을 챙기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인데...(예전 특정시기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가장 흥미롭던 건 밤낮으로 전화기를 들고 숙소 테라스에서 줄담배와 라면을 즐기던 이가 인스타그램 같은 류의 어떤 SNS에서 엄청난 팔로워를 거느린 사람이라는 것. 그는 중국에 살고 있어 인스타그램은 사용 못 한단다. SNS 속 그는 대만 먹방 스타였다.

온갖 종류의 대만 음식을 먹는 동영상을 찍어 에 SNS에 올린다. 지금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와중에 한켠에서 과일, 과자를 먹는 영상을 찍어 실시간으로 올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즐거워했고, 모든 상황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싱가포르 노부부는 이 곳 공기에 지긋한 무게를 더했다.


나는 갑자기 용기가 생겨 방에서 드로잉북을 가지고 와, 그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니, 왜 이렇게 다들 귀여운가.

조용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하나 둘 다가와 그림 속 자기를 발견하고는 기뻐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곁엔 온 그들 하나하나와 인사를 나누고 그림 속에 각자의 이름을 적어달라고 요청했다. 내 앞 접시에는 친구들이 주는 다정한 음식들이 쌓여갔다.

늦도록 이야기가 이어졌다. 모두 저마다의 사연으로 망고여관에 모였고, 같은 사연은 하나도 없었다.


긴 시간이 끝나고 침대로 돌아와 오랜만에 등을 대자마자 잠에 들었다.


스크린샷 2026-03-02 오후 2.19.56.png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망고여관의 밤. 원본 드로잉북을 여행 후 분실하였지만 다행히 사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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