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옥스퍼드로 향하는 길.
이상은 자신의 뒷 자석으로 45인승 대형 버스에 손님들을 가득 태운 채 멋진 모자를 쓴 가이드가 영국과 옥스퍼드에 관한 장황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런던의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시외로 나갈수록 건물들이 사라지고, 봄을 실은 대지의 푸르름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국의 봄처럼 겨우내 숨죽여 살았던 나무들이 연두색의 생명력을 뿜어내었다.
잉글랜드 섬은 높은 산은 없으며, 대부분 낮은 구릉과 옅은 초록색의 드넓은 초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시골로 진입하자 더없이 조용하고 한적한 농가의 모습이 이어졌다.
버스는 M40 외선 고속도로를 타고 옥스퍼드로 달렸다. 약 2시간 반을 부지런히 달리자 영국 최고의 학문의 상아탑인 옥스퍼드 대학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옥스퍼드로 진입하는 고속도로에는 옥스퍼드를 지나 버밍험이 나오다는 표지판도 보였다.
길 옆의 나무들은 대부분 작은 솜털이 송송 달라붙은 듯한 가시덤불 Bush 같은 종류의 나무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런지 마치 땅 위에 두꺼운 카펫을 깔아놓은 듯했다. 그리고 간간히 아름다운 잉글랜드 전통 가옥의 집들이 동화 속 나라에 들어온 것처럼 균일하게 들어서 있었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넓은 울타리 안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이다. 이러한 모든 풍경이 잉글랜드의 그림을 완성해 주었다.
옥스퍼드 대학가 안에서도 유명한 장소 몇 군데를 둘러보았다. 영화에 자주 등장했던 유명 서점이나, 옥스퍼드 대학 내에 유명한 건물과 과거 잉글랜드 왕실의 면모를 둘러볼 수 있는 왕궁 등등, 손님들은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기념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옥스퍼드라는 도시 자체가 대학으로 인해 유명해지고 생성된 도시이기에 전반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가 도시 전반에 감돌았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사암으로 만들어진 고전적인 고성과 건물들을 보고 있노라니 이상은 마치 중세 시대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한국을 떠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가를 한가로이 거닐게 될 것이라고는 생애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러한 여행과 새로운 나라와 도시와의 접촉이 아주 흔한 일상이 되어 버리자 이러한 생각들을 점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여행의 향수,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과 기대 같은 것들은 적당한 시간차와 휴식이 그 사이에 끼어 있어야 지속적으로 살아나는 법이다. 이상은 사실 몇 달간 반복된 출장과 일정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낯선 사람들을 상대하고, 밤낮 가리지 않고 이들의 요구에 반응하기 위해서는 감정적 소모가 너무나도 컸다. 자신의 내면에 축적되어 있던 감정의 양이 반복된 출장과 여행으로 인해 점점 고갈되어 갔으며, 그 자신조차도 이러한 고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과 내면 속 감정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미정뿐이었다. 단 하루를 집에 돌아와 쉬었다 하더라도 이상은 곧 내적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 웃는 얼굴, 따뜻한 식사, 편안한 잠자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1주일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났을 때의 행복과 기쁨 같은 감정이 지난 출장의 피로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상은 한적하고 따뜻한 봄날의 옥스퍼스 교정에서 계속 그녀를 다시 만날 순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긴 여정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이자 희망이었다.
며칠 뒤 이상은 런던 히드로 공항을 통해 태양과 정열의 나라 스페인에 도착했다. 약 두 시간 반의 비행을 거쳐 스페인 동부의 카탈루니야 주의 주도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전날 영국에서의 밤공기는 제법 차가웠지만, 스페인의 공기, 그중에서도 지중해의 온풍을 품은 바르셀로나의 하늘은 맑고 따뜻했다. 플라밍고와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에스파냐 반도의 전형적인 날씨였다.
오후 두 시, 한국은 이미 저녁 9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이상은 그녀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지만 지구 반대편까지 떨어진 육체의 거리가 가져다주는 단절과 외로움을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라 느꼈다.
'내가 없는 그녀의 주말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을까?'
그는 높은 고도의 몬세랏 산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오늘이 일요일임을 깨닫고 한국에 혼자 있을 그녀의 공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키가 큰 나무가 거의 없고 낮고 작은 나무들만이 듬성듬성 자라 있는 몬세랏 산등성이에는 색색이 가득한 꽃들이 피어있었고, 나무에서는 연하고 순한 새순들이 쏟아내고 있었다.
산 아래쪽에 다다를수록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나무들이 작은 강변을 뒤덮었다. 그 아래로 조용히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케이블카를 내려 사람들을 데리고 이 강을 건너는 다리를 걷다 보니 이곳 스페인에도 한국과 동일한 봄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 카탈루니아 곳곳을 다니며 온 천지에 봄이 완연했음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에 완연한 봄도 찾아온 순간이었다. 서로의 부재의 순간에 서로에 대한 생각의 꽃이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그때, 이 봄이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