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시티,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
슬로시티(slowcity)
원래 이탈리아어 '치타슬로(cittaslow)'의 영어식 표현으로 유유자적의 도시,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뜻이다. 1986년 패스트푸드에 반대해 시작된 슬로푸드 정신을 삶으로 확대한 개념으로 전통과 자연생태를 슬기롭게 보전하면서 느림의 미학을 기반으로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과 진화를 추구해 나가는 도시라는 뜻이다. 이 운동은 이탈리아의 소도시 그레베 인 키아티의 시장 파울로 사트리니가 창안하여 슬로푸드 운동을 펼치던 1999년 10월 포시타노를 비롯한 4개의 작은 도시 시장들과 모여 슬로시티를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재 세계 16개국 110여 개 도시가 가입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슬로시티는 아시아 최초로 지정된 전남 4개 지역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 마을, 장흥군 유치면, 완도군 청산도, 신안군 증도를 포함하여 경남 하동군 악양면(차 재배지로서 세계 최초), 충남 예산군 대흥면, 전주 한옥마을, 남양주시 조안면, 청송군 부동ㆍ파천면, 상주시 함창ㆍ이안ㆍ공검면, 강원 영월군 김삿갓면, 충북 제천시 수산면 등 12곳이 있다.
나는 함평을 떠나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슬로우 시티인 신안군 증도로 갔다. 일전에 증도에 관한 책을 보고 그 섬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과 넉넉한 인심에 취해 언젠가 꼭 한 번 가보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그 어떤 선택의 망설임도 없었다.
증도로 가기 위해서는 함평에서 먼저 무안을 거쳐간다. 함평과 증도 모두 아주 작은 소도시였기 때문에 두 도시를 바로 이어주는 버스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함평에서 무안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증도로 갔다. 나를 태운 버스는 무안을 떠나 신안군의 지도를 지나 증도로 들어가는 증도 대교를 건넜다. 증도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짧지 않았다. 지도상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았지만 막상 버스를 타고 가니 약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증도 대교를 건너면서 아름다운 신안 군도(群島)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증도를 이렇게 부른다. 왜 많은 사람들이 증도를 천사의 섬이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내가 증도에 첫 발을 내딛고 길을 걸으며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는지를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증도는 옛 중국 송·원나라 시대 때의 보물을 실은 배가 침몰한 보물섬의 전설과 바닷물보다 훨씬 짠 태평염전의 짠 내와 소박한 섬사람들이 성실한 삶이 한데 얽힌 조용하고 소박한 섬이다.
나는 증도대교를 건너자마자 버스 기사에게 섬 입구에서 내려 달라고 말하고는 그곳에서부터 다시 걸어가기로 했다. 나는 섬의 처음과 끝을 구석구석 밟으며 이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증도 대교를 건너자 증도의 주요 관광지와 증도에 관한 설명이 들어간 표지판이 보였다. 나는 그 지도를 보고서 증도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하루나 이틀 정도면 섬의 구석구석 전부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섬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증도의 중심지로 먼저 가보기로 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내가 길을 걷는 동안 차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사람도 만날 수 없이 조용한 섬이었다. 얼마나 조용했던지 도로를 따라 흐르는 작은 시내에서 물고기가 가끔 뛰어오르는 소리까지 들렸다.
멀리 서는 바닷가의 파도 소리가, 가까운 산에서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소리가, 작은 개울에서는 물고기들이 첨벙 하는 소리가, 그리고 때 이른 개구리 소리까지 들려왔다. 지극히 고요한 섬을 나는 배낭을 메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그렇게 빠르지도 않게 느리지도 않게 여유를 가지고 섬의 곳곳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섬 전반에 흐르는 도도한 고요함과 아름다움 자연이 내게 밀물처럼 천천히 밀려들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게 살아가느라 푸른 자연이 토해내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소리들에 어색함마저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 더 느리게 걷고 한마디 말도 한 박자 늦추어 말하고 생각도 한 박자 늦추어 다시 생각한다면(Think Again) 이 모든 자연의 소리와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증도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던 것은 그래도 증도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증도 면사무소에 들렀을 때였다. 섬의 입구에서 증도 면사무소까지는 거리로만 쳐도 꽤 먼 거리였다. 그런데 그 먼 거리를 걷는 동안 단 한 대의 차도, 단 한 사람도 나는 만나질 못했다. 그만큼 증도라는 섬은 조용하고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마치 넓게 펼쳐 놓은 나무 없는 깊은 산중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고요함이 좋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안에 가까운 산에서 흘러들어온 아카시아 향기처럼 증도의 고요한 정취(情趣)가 아무것도 없는 내 마음의 방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이 고요함과 느림의 신비에 관해 이렇게 정의 내리겠다.
*행복은 자연 속에서 텅 빈 충만함이다.
나는 섬의 중심부인 증도면 사무소가 있는 거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오늘 하루를 묵을 숙소를 알아보고 혹시나 자전거를 빌릴 수 있을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증도면사무소에 가기 전에 있는 민박 집이었는데 혹시나 숙박이 가능한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무리 대문을 두드리고 심지어 집으로 들어갔는데도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 살기는 한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지금처럼 사람들이 잘 찾지 않거나 농사나 어업 일이 바쁠 때는 집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변에 다른 민박 집을 둘러보았는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증도에는 도둑도 없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문이 개방되어 있어서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몇몇 사람들을 발견했다. 길에서 무심코 만난 할머니, 아이들, 아저씨들이 모두 나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방금 하교하는 길이었던 아이들은 정말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나에게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인사를 했다. 이런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지만 그래도 이러한 섬사람들의 친절함이 이곳 증도에 천사의 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되지는 않을까?
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한 1km쯤 더 가면 넓은 염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정말 말 그래도 수평선까지 염전이 이어져 있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질 좋은 천일염을 생산해 내는 전국 최대 규모의 태평염전이다.
실제로 태평 염전은 전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소금을 생산해 낸다. 이 천일염 안에서 수 십 가지의 미네랄과 우리 신체에 꼭 필요한 성분들이 적절한 비율로 들어가 있다. 그 이유는 서해안의 갯벌에서 조수 간만으로 인해 뻘물이 갯벌 안에 있는 영양소를 머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은 전 세계적으로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잘 발달되어 있어 미네랄과 영양분 함유량이 세계 최고라고 한다. 그래서 여기 태평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전국 제일의 소금이 아니라 세계 제일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태평 염전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소금은 국내가 아니 주로 일본을 중심으로 한 해외로 수출되거나 판매된다. 우리나라에서 태평 염전을 비롯한 신안군의 천일염을 사려면 직접 가서 사던지 도매상을 통해 구할 수 있다.
태평 염전을 지나 바다에서만 자라는 식물군을 한 곳에 모아 놓은 태평 염생 식물원으로 갔다. 여기에는 건강에 좋다는 함초가 있었다. 함초는 다른 식물에 비해 주요 미네랄이 풍부하며 그 외에 90여 종의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필수 아미노산인 발린, 류신, 메치오닌 등도 다량 함유되어 있으며 식이섬유가 풍부해 숙변과 변비를 예방하고 중성 지방질을 분해하여 비만을 억제하는 작용도 한다고 쓰여있었다.
그 후에 자그마한 소금 박물관과 증도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작은 선착장까지 둘러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나는 멀리 흐려져 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느림의 미학에 관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외딴섬의 솔밭에 앉아 백사장에 밀물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보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마치 이 온 섬이 내 것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평생을 장인匠人으로 살겠다.'
증도에서 보았던 염전의 노동꾼들과 곡식을 일구던 농부와 통나무집을 짓고 도기를 만들던 도공을 보고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느림의 미학이 살아 숨 쉬고 불과 흙과 바람과 바다와 호흡하며 살아가는 장인, 그것이 나의 가치이며 삶의 본질이 되었으면 좋겠다.
달팽이처럼 여행자는 자신의 집을 짊어지고 간다.
나의 세상은 벽 가득히 채워진 책들과 처음 가보는 새로운 땅 사이를 거니는 데에 있으며, 세상의 빠른 변화 속에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느림의 미학에 중독된 장인의 마음속에 있다.
(이날은 면사무소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 젊은 도서관 사서의 도움을 받아 숙박을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