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에서 만난 은인
전라남도 함평.
아주 오래전에 딱 한 번 가보았던 전라도 땅이었다. 매년 봄과 가을이 되면 함평에서는 국향대전과 함께 나비 축제라는 것이 열린다. 그 늦은 가을, 나는 친동생과 함께 며칠간 함평에 묵으면서 이 축제에 가본 적이 있었다. 드넓은 들판에 화려한 국화와 각양각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모습이 기억난다. 그때는 늦은 가을이었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운 축제가 내게는 여전히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함평의 아름다운 꽃밭은 무수한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어린아이들과 가족들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나의 동생과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래서인지 시골의 전라도 어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함평만은 내 기억 속에 유난히 더욱 풍요롭고 드넓은 땅이었다. 땅도, 사람도, 마음도.
내가 함평으로 향하는 이유는 한 사람을 만나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인생에 있어서 용서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용서를 구하려고 노력해 본 자만이 알 것이다.
2008년의 늦은 가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된 일이다.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함평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방문의 목적은 내 인생의 절망의 시기에 나를 도와주었던 한 분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 해 내가 중국으로 유학을 결정하고 돈을 모으며 준비하고 있었을 때 그분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내게 선뜻 모자란 유학비의 거의 대부분을 지원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분은 평소에 내가 잘 챙겨 주었던 후배의 어머니였는데, 후배를 통해 들은 평소 나의 성실한 삶의 태도와 어려운 가정 형편을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학을 끝마치고 2008년의 늦은 가을, 군 입대를 앞둔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도 그분에게 고마움을 전하고자 함평으로 갔었다.
그분은 나를 처음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처럼 나를 환영해 주셨다. 나는 그 집에서 며칠간 묵으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인생을 오래 살아 본 사람에게는 언제나 배울 것이 많았다. 나는 그 분과의 대화 가운데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실함과 끈기가 가장 필요하다는 말이 기억난다. 나는 묵묵히 나보다 몇십 년은 앞선 인생의 교훈을 들었다. 나는 그 교훈들이 내 가슴 깊이 와닿았다. 그러나 젊은 날의 나 자신은 언제나 자주 실수를 하기 마련이었다. 그분의 집에 있는 동안 매일 밤 나는 중국에 있는 나의 옛 애인과 국제 전화를 했고 그것이 나중에는 엄청난 요금 청구서로 다시 돌아온 것을 나는 입대하고 난 후에야 알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분에게 미리 말을 했더라면 훨씬 싼 비용으로 국제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카드가 있었단다. 그러나 나는 그 밤의 국제 전화가 그렇게 큰 비용이 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었고, 그 사실을 진실하게 말하거나 후에 다시 언급하지 않았었던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또한 그분은 나에게 쉽게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다. 서로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미안함 같은 것들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내가 제대를 한 후 내 삶은 많은 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일이 너무나 바빴고 나에게 선한 호의를 베푼 많은 사람들을 잊고 살아가게 되었다. 마치 그들의 호의가 내게는 꼭 필요했다는 듯 한 태도로 살게 된 것이었다. 그분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시간은 서로의 관계를 더욱 세게 매듭 짓게 만들었고, 나는 당장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챙기지 않고 살게 되었다.
내게 베푼 모든 사람들의 선한 호의를 나의 미숙함과 근시안적인 태도와 이기심이, 그리고 인생을 돌아볼 수 없었던 조급함이 완전히 가려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이 매듭을 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기억과 과거 속에 묻혀 있던 사람들의 매듭지어진 실타래를 하나씩 풀려고 이 길을 나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사과하기 위해, 또 나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그분의 집을 10년이 넘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 찾아가 보기로 했다.
나는 함평 버스 정류장에 내려 먼저 손불이라는 동네로 가는 버스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해 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함평의 땅은 손불이라는 생소한 지명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손불로 가는 버스가 30분 뒤에 한 대가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함평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주변을 좀 둘러보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 밖으로 나가보니 구석 한편에 방금 땅에서 캔 듯한 식물을 파는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나는 호기심이 일어 그곳으로 가 보았다. 처음에는 옥수수를 파는 줄로만 알았다. 생긴 모양이 꼭 옥수수 같아서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를 듣고서 그것이 옥수수가 아니라 커다란 죽순임을 알게 되었다. 함평의 어느 마을에 사는 할머니가 직접 대나무 밭에서 이렇게 커다란 죽순을 발견하고 그것을 캐와서는 내다 팔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할머니 주변으로 몇몇 사람들이 모여 땅에서 캐낸 그 수확물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커다란 죽순을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할머니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캔 커다란 죽순을 끊임없이 자랑하며 지금이 아니면 이런 좋은 죽순을 살 기회가 없다고 말하면서 흥정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것 또한 평범한 시골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이런 소박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 대화하는 모습이 내게는 이미 멀리 사라져 버린 정겨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어떤 중년 아저씨 한 분이 할머니의 커다란 죽순을 샀다. 죽순을 판 할머니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다. 나는 옆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돌아보니 그 모습 속에서 나는 행복을 느낀 것 같다.
시간이 조금 더 남자 나는 버스 정류장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 주변이 아마도 함평의 중심지 같아 보였다. 농협을 비롯해 식당 같은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것으로 보아 읍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안 돼서 함평 시골로 들어가는 버스가 왔다. 나는 버스 안에서 예전에 함평을 방문했었을 때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오직 10년 전의 희미한 기억만을 의지해 함평의 시골집을 찾아야만 했다. 그분이 살던 집은 작은 언덕이 집 뒤쪽으로 자리 잡고 있고 새로 지은 신축 집이 넓게 펼쳐진 들판을 가로질러 서 있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함평 버스 터미널에서 손불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무작정 창문을 바라보며 가보기로 했던 것이다. 만약 내가 기억하는 풍경과 유사한 동네가 나오면 버스에서 바로 내릴 생각이었다. 과연 나의 기억이 시간을 이길 수 있을까?
비가 오고 난 다음이라서 그런지 대지에서는 높게 떠오르는 태양빛에 맞추어 수증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금 같은 봄철에만 잠깐 볼 수 있는 절경이었다. 버스가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을 때, 나는 예전에 내가 기억하는 그 마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기에 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그래서 그 마을을 돌아다니며 예전의 그분의 집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막상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어디가 어딘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을의 파출소에 들러 도움을 요청했다. 파출소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나의 사정이 이러이러해서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하니 푸근한 두 분의 경사께서 기꺼이 도와주셨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분의 집 주소와 위치를 알게 되었다.
파출소의 도움을 받아 그분이 살고 있는 동네로 가는 길에 미리 전화를 받고 나온 그분이 차를 몰고 나를 맞이하러 나오셨다. 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차창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은인을 발견했다. 나는 결국 그분을 10년이 넘는 시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할 말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차의 문이 열리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함께 그분의 환한 미소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무엇을 말하기 전에 그분은 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또 내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밥은 먹었능가?"
"... 아니요, 아직."
"그럼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 어서 차에 타려무나."
"네."
나는 뒷자리에 앉아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내 수첩에 적어 두었던 과거의 실수에 관한 문장이 생각났다.
* 실수를 바로잡으려면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
진실만이 가장 강한 것이고 끝까지 서로를 기억하게 만든다.
나는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 저... 그때 생각해 보니 제가 너무나 어렸고 책임감과 진실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제가 이제라도 이렇게 찾아뵙고 꼭 드리고 싶은 말은 정말 죄송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분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전부 안다는 듯이
‘그만 되었다야. 무슨 말인지 말 안 해도 내 다 안다. 사는 것이 쉽지 않더지? 한동안 네가 연락이 없더니 니 맘에 뭔가 맺힌 게 있지 않겠나 싶었더니 그래도 항상 한 번 연락은 안 오겠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리 다시 만났으면 된 것이지... 이제 그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신 마지막 말에 나는 숨죽여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여기까지 살아오느라고 참 고생혔다. 사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더지? 더 많이 배우고 알게 되었으면 그걸로 된 거다. 여기까지 참으로 잘 와주었구나."라고.
나는 그 말속에 담긴 그분의 진심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던 것. 그것은 뭐랄까?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나의 마음속 어떤 응어리 같은 매듭이 확 풀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그분이 하시는 삶의 이야기들을 계속 들었다. 여전히 배울 것이 많고 느낀 것이 많았다. 인생을 더 많이 살아 본 노인에게 젊은이는 반드시 배울 것이 있다. 그들의 인생의 이야기는 하나의 교훈이자 삶의 나침반 같은 것이므로.
그래서 나는 수첩에 다가 여행에 대한 또 다른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그분에게 푸짐한 점심을 대접받고 나서 나의 무전 여행길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이제는 그만 걸어 다녀도 되니 될 수 있으며 버스를 타고 끼니도 꼭 거르지 말라고 하시면 여행 경비 얼마를 손에 쥐어 주셨다. 나는 끝까지 극구 사양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그분에게 사랑의 빚과 감동만 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분은 나를 언제나 그렇게 기뻐해 주셨다.
결국 내가 버스를 타고 함평에서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난 다음에야 그분은 길을 돌이키셨다. 나는 멀어져 가는 차창 밖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자 다시 눈물이 고여왔다. 어찌 나 같은 사람은 저리도 한결같은 사랑에 감동하게 되는 것인지. 산다는 것은 결국 맺힌 매듭을 푸는 것이며, 그 매듭을 하나씩 풀어갈 때마다 인간은 행복해진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다시 남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산다는 것>
산다는 것은
맺힌 매듭을 푸는 일이다.
그것은 바램이다.
태어나 죽은 날까지
어슴프레 떠오르는 지평을 향해
꾸준히 신발을 고쳐 신는
영원한 바램 그것이다.
주인 없는 시공을 받치고 서서
부모형제와 이웃들
또 다른 나와의 조우.
오가다 마주치는 눈길도
희노애락의 어느 길목에서
무심코 버린 한숨도
삶을 확인하는 소중한 인연이다.
쉽게 맺힘 매듭도
쉽사리 풀리진 않는 법.
풀리지 않는 매듭을 풀기 위해
더욱 열심히 발버둥 치다 보면
어느새 해는 서산에 구르고
전생의 아픔은 조용히 닫히는 것을
설혹 풀렸달지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굳게 맺히는 매듭들을
하루살이처럼 시간이나 축내며
자꾸자꾸 풀고 맺는 세상살이
산다는 건
결국 풀린 매듭을 다시 맺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