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젊은 날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무전여행을 하며 나를 찾아간 나의 행복론이다)
다음날, 정읍역사 안에서 사람들이 시끄럽게 왔다 갔다 하는 소리에 선잠이 깼다. 아무리 역사 안이라 해도 5월의 새벽 기온은 뼛 속까지 파고드는 냉기가 가득했다. 나는 얼른 가방을 다시 을러메고 역사를 빠져나왔다. 새벽에 다니는 첫 버스가 있는지 확인해 볼 참이었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한산하지만 정겨운 촌구석 길에는 사람도, 버스도 드물었다. 단지 바닥에 짙게 깔린 새벽안개만이 가득했다.
밤새 잠을 뒤척인 탓인지 몹시 배가 고팠다. 가방 안을 살펴보니 물과 과일 몇 개, 그리고 과자 좀 남아 있었다. 텅 빈 정류장에 앉아 새벽 첫차를 기다렸다. 그 첫 버스의 행선지가 오늘의 목적지였다.
곧 한 대의 낡은 시골 버스가 미끄러지듯 하품 소리를 내며 정류장으로 들어왔고 나는 기사에게서 담양 쪽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담양으로 향했다.
그렇게 담양의 어느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오전까지 충분히 잠을 자두었다.
얼마나 깊이 또 오래 잠들었을까? 잠에서 깨어나 보니 밖은 여전히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뚫고 가까스로 광주의 어귀까지 당도할 수 있었는데, 내 인생의 첫 번째 광주행이었다.
오후 두 시가 거의 다 나는 늦은 식사를 챙겨 먹었다. 그리고 광주에 예전부터 한 번 꼭 만나고 싶었던 한 친구가 있음을 생각해 냈다. 그는 나의 군 시절 몇 달 앞선 선임이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렸다. 군대에 있을 때 워낙 서로 잘 챙겨 줬었던 터라 제대 후에 반드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었다. 그러나 살아온 세월이 서로의 재회를 허락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결국 군 제대 후 그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얼른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나의 목소리를 듣고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서로 짧은 인사와 안부를 묻고는 바로 오늘 저녁에 만날 약속을 정했다.
나는 식당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J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J는 퇴근을 하고 바로 내게로 오는 길이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그의 아파트 입구에 있는 편의점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30분도 채 되지 않아 약간은 호리호리해진 J를 4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의 얼굴 속에 기쁨과 반가움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먼저 그의 집으로 가서 짐을 풀어놓고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J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광주에서 제일로 손꼽히는 국밥집이라고 자랑을 했다. 그곳은 간판도 제대로 달려있지 않은 허름한 곳이었지만 맛을 정말 일품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먹어보았던 국밥 중에서 거의 최고로 맛이 있었던 국밥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 밤이 새도록 J와 대화를 나누었다.
J는 원래 방사선 치료 전공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도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광주에서 취직이 되어 일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J에게 어떻게 취직이 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고 J는 나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어떤 인생이든 쉽지 않은 인생이 없었으며 그 가운데 노력 없이 이루어진 결과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어떻게 새로운 분야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물어보았고 그는 더욱 진지하고 흥미진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인생은 짧게 보는 것이 아니라 길게 보는 것이지,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지내는 군대 선 후임들의 소식들, 앞으로의 계획과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밤이 새도록 나누었다.
나는 J와 불 꺼진 방에 누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정이란, 불 꺼진 방에 누워 주지도 주제도 방향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서로 대화하는 가운데 생긴다. 그것은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는 일이며 서로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우정으로 인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우정을 잃어버리거나 가질 수 없게 될 때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이 하룻밤의 대화와 만남은 지난 4년 간 서로의 단절된 시간들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이것은 우정이라는 끈이자 만남이라는 마법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만 지켜보다가 처음으로 나이를 초월한 친구와 나에 관한 행복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우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수첩에 있는 다음 문장을 기억해냈다.
*행복은 우정이다.
다음 날 아침 7시가 조금 넘는 시각에 J가 일어나는 시간에 나도 함께 일어났다. J는 여전히 출근을 위해 아침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집에서 조금 더 쉬다가 가라고 했지만 나는 갈 길이 멀기에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집을 나설 때에 나도 함께 집을 나섰다.
내가 광주에서 함평으로 간다고 하니 J는 나보고 광주 시외버스 터미널 쪽으로 가는 버스를 알려주었다. 그곳에 가면 함평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곧 비가 조금씩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J와 악수를 하고 다음에 만날 날을 기약하며 서로 헤어졌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찰옥수수 하나를 샀다. 그것을 한 알씩 떼어먹으며 이른 아침밥을 대신했다. 그러자 곧 함평으로 향하는 버스 한 대가 미끄러지듯 승강장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습기를 머금은 배낭을 고쳐 메고 함평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