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험한 땅에서 가장 강인한 생명이 자란다.
오늘처럼 장마가 물러가고 남태평양으로부터 몰려온 뜨거운 공기가 대기와 지면을 뒤덮어 온 몸이 푹푹 찌는 무더운 날씨가 이어질 때는 나는 한여름에도 시원한 사람과 설산의 풍경으로 가득했던 파미르 고원이 간절해진다.
파미르 고원은 중국의 가장 서쪽 경계와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동쪽 경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원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파미르'라는 단어의 명칭에서 느껴지듯 이 지역은 지리적 경계로 나뉜 중국의 땅이 아닌 예로부터 중앙아시아인들의 땅이었다.
더 정확한 지리적인 경계로 따지면 현재 중국 서쪽의 신강위구르 자치구의 서쪽에 자리 잡은 교역도시 카스(카스까지 갈려면 우루무치에서 서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여야 한다)에서부터 서쪽으로 약 240km 떨어진 키르키지스탄과 타지키지스탄의 국경 지대에 걸쳐 자리 잡고 있다.
파미르 고원의 북동쪽으로는 신강위구르 자치주의 천산 산맥이, 동쪽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남동쪽으로는 곤륜산맥과 티베트 고원이, 남쪽으로는 히말라야의 끝자락인 힌두쿠시 산맥이 이어져 있고, 그 너머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땅이 있다. 흔히 중앙아시아 대부분 나라들의 이름이 ~스탄으로 끝나는데, 이는 '~의 땅, 나라'라는 뜻이다. 이는 동남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이름이 '~리아(이탈리아,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등)'로 끝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곳 파미르 고원은 평균 해발이 6100m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원으로 한 여름인 6~7월에도 눈을 볼 수 있는 지역이다. 나는 눈을 볼 수 없는 한여름의 절기를 지나고 있는 한반도에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내 눈앞에 이곳 파미르 고원의 비현실적인 풍광과 그곳에서의 오지 여행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 여행의 시작점은 중국 서쪽 변방의 교역도시인 카스에서부터 시작된다.
카스라는 교역도시는 예로부터 중국의 장안(지금의 산시 성의 시안이다)에서 시작된 실크로드의 중간 지점, 즉 중국과 중앙아시아 및 서역을 잇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사막에 감추어진 오아시스처럼 아주 건조하고 삭막한 곳에 모여 살고 있는데, 사막 위에 세워진 교역 도시인만큼 동서양이 공존하는 다양한 인종들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다. 지금은 중국령의 지배를 받아 많은 한족들이 유입되었지만, 예로부터 이 땅은 위구르인들, 우리가 알고 있는 돌궐 족의 후예들, 서양사람들에게 알려진 투르쿠족의 후손들의 땅이었다. 그래서 카스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푸른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전형적인 중앙아시아인들이며, 대부분이 무슬림이다.
파미르 고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슬림인 위구르 사람들과 함께 숨 쉬며 이어져 온 땅 카스에서부터 다시 차를 타고 약 4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야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원 지대에 당도할 수가 있다,
내가 파미르 고원을 여행했을 때가 7월 말이었다.
한국의 여름은 폭염으로 단 30분도 야외에서 다닐 수 없을 정도의 더위였지만, 이곳 중국 서쪽의 변방인 파미르 고원의 바람은 매서웠다. 카스에서 파미르 고원으로 가는 버스의 차창 밖으로 펼쳐진 고원의 설산은 지금이 과연 7월 말의 한 여름인가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강하게 불어오는 고원의 바람은 이 땅의 억척스러움을 나타내는 듯했다.
카스에서 고원 지대를 지나는 모든 사람들, 특히 중국 국경 안으로 들어와 있는 모든 외국인들은 반드시 도시의 경계 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차량에서 내려 한 사람씩 신분 검사를 받아야 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 줄로 길게 줄을 서서 여행의 목적을 밝히고, 여권으로 제시해야만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검문소가 파미르 고원으로 가는 길 동안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중국의 모든 변방은 중공군이 관할하고 관리한다. 나는 그들을 중국의 모든 국가 경계에서 보았다. 흑룡강성과 외몽고 자치주의 러시아 경계에서, 티베트로 들어가는 쓰촨 성과 칭하이 성의 경계에서, 윈난 성 시 수앙 반나 자치주의 미얀마와 라오스경계에서 말이다. 그들의 힘과 공권력은 곧 이 땅의 법이자 경계였다.
검문소를 지나 차를 타고 파미르 고원을 더욱 달리자 세찬 흙탕물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내렸다. 따뜻해진 여름의 기온이 설산의 눈을 녹여 이루어진 일시적인 냇물들이었다. 그렇게 크고 작은 냇물들이 모여 낮은 지대에 작은 호수를 만들고, 거짓말처럼 건조하고 추운 고원의 호수 주위로 정말 비현실적인 푸른 초장을 이루어 냈다.
그 호수 뒤로 보이는 산들이 하도 번쩍이길래 저것이 처음에는 눈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눈이 아니라 백사였다. 따라서 이렇게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는 하얀 모랫가루가 날아다녀 저렇게 뿌옇게 산의 형태가 흐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기이하고 황홀하던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아오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아름다운 푸른 초장에 둘러싸인 투명한 거울처럼 빛나는 고원의 호수.
모든 것이 완벽한 풍광이었다.
그 초장 위에서 이때뿐인 푸른 초록잎을 한가로이 뜯고 있는 양과 야크 떼들을 보면서 과연 이곳은 어디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높고 험한 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생명들이 살아가는구나 하는 생각, 여름이 이 정도이면 겨울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옆에 있던 현지 가이드에게 나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이렇게 춥고 험한 곳에서는 사람이 살기는 힘들겠네요?"
그러자 거친 바람과 따가운 햇볕에 검게 그을린 젊은 여성 위구르인 가이드는 오히려 내게 활짝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가장 험한 곳이기 때문에 이 땅은 가장 강인한 생명을 길러낼 수 있는 거죠."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가 생명과 삶에 관해서는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니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보였던 파미르 고원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한참을 달리다 잠시 차를 세우고 일행들과 함께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어느 한 마을에 내려 쉬었다 가기로 했다. 국경을 넘는 하나뿐인 도로에는 우리 버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버스가 정차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 마을 사람들이 버스 주위로 몰려들어 얼마 하지도 않는 작은 기념품들을 팔려고 서로 난리법석들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아마도 이 길을 통해 많은 관광객들이나 여행객들이 지나갔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익숙한 듯 차창으로 몰려들어 자신이 만들었는지, 혹은 다른 곳에서 가져왔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각종 목걸이와 돌들을 내밀었다. 우리는 물건을 살 생각이 없었지만, 저들의 순수함과 이 자연의 광활함과 황량함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려 한 두 개씩 물건을 사 주었다. 사실은 우리들이 그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순수함과 안타까움에 대한 정을 사 주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이곳 파미르 고원 속에서 단절되고 고립되어 현대인들이 누리는 보편적인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고 살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한 여름 7월에 보았던 파미르 고원의 풍경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안타까우면서도 아픈 감정도 느꼈다. 아마도 이곳은 내 생애 다시는 오지 못할 곳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래서인지 길지 않은 여행의 시간 동안 내가 보았던 모든 것들을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금 다시 누군가 내게 이곳 파미르 고원으로 가 보겠냐고 제의한다 해도 다시 그 멀고 험한 길(인천-우루무치;비행기 6시간, 우루무치-카스; 기차 14시간, 카스-파미르 고원; 차량 4시간)을 나는 선뜻 나설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내게는 더욱 소중하고 의미가 깊었던 파미르 고원 오지 여행이었다.
나는 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사진 한 장 속에서 그때의 그 마음을 다시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