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계약직 집순이 미국 마트 아줌마의 버티기 전략
어떻게 미국 슈퍼마켓이 취업이 되긴 했지만, 나는 아직 '임시로 고용된 계약직'이었다.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파리 목숨이랄까. 슈퍼마켓에 가는 게 주부로서의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던 이 장소는 내게는 그저 살기 위해 먹거리를 사는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일을 하는 입장에서는 피곤하고 까다로운, 애증이 교차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내게 "당신은 계약직 직원이므로 앞으로 어떠한 절차를 거쳐서 향후 당신을 계속 고용할지 결정하겠습니다." 이런 설명을 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든 건 스스로 알아서 눈치껏 행동해야 했고, 대신 내가 질문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면 성심성의껏 대답해주곤 했다. 그런데 그것도 사람에 따라서다.
회사의 업무 가이드라인 자료를 찾아보니, Evaluation period라고 고용한 지 첫 90일 동안은 이 사람이 우리와 함께 일할 수 있을지 평가되는 시간이었다. 동료나 리더들에 의해서 트레이닝과 피드백을 받고, 성과 격차나 정책 위반은 시정 조치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 조치에는 해고까지 포함될 수 있다고 쓰여있었다. "통보 없이 계약을 종료할 수 있고, 법에 의해 요구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당되는 모든 법률을 준수할 것입니다.”
계약직은 파트타임이나 풀타임이 될 수는 있었지만 이조차 보장된 건 아니었다. 법이 센 미국다운 가이드북을 보고 정신이 더 바짝 차려졌다. 일을 하면서도 집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별안간 백수가 되어버린 성질이 괴팍해져 가는 남편의 얼굴과, 엄마와 아빠가 자기 뒷바라지해 주겠다고 몸을 갈아 넣어서 어쩌다가 미국까지 와버린 이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면서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 또 나 역시 출근하는 남편에게 해보지 못한 말이었던 "오늘도 고생해."
운전도 못해서 남편이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그에게 들은 이 말 한마디가 괜히 코 끝이 찡해지고 굉장히 엄숙하고 비장하게 다가왔다.
나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고, 이곳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존재감 없는 계약직이 아니라, 최소한 파트타임으로서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중년의 몸뚱이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출근 시간 엄수였다. 출근하면 Punch in/out을 하는 출퇴근 기록기(Time clock)에 입력을 해야 하는데, 이 출근 시간이 당연 1순위였다. 만일에 지각을 하면, 내가 지각한 정확한 시간만큼, 내 시스템의 UPT(Unpaid Time Off)라는 항목에서 자동차감이 되고, 그 UPT의 잔액이 '0'이 되는 시간 이유 불문하고 해고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라이딩을 해주는 나는 단 1분이라도 늦을 것 같으면 차에서 소리소리를 질러가며 '내가 여기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버터야한다고!! 달리라고!!" 도착하면 뛰어가서 출근카드를 찍기에 바빴다. 90일간 그 어느 오점 하나도 남기고 싶지 않을 만큼 내 삶은 절박했다.
또, 적극성과 열정을 보이기 위해, 90일간 이 슈퍼마켓은 나의 제2의 집일 정도로 이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돈도 궁했기에 내가 일한 만큼 더 급여를 받으니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집안일이나 내 상황을 다 내팽개치고 나의 근무시간을 1순위로 잡았다. 계약직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하기 위해, 1개의 시프트가 끝나면 그곳에서 몇 시간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두 번째 시프트를 또 하기도 했다. 물론, 주말도 반납했다.
중간에 집에 갈 수도 있었지만, 우리 집은 차 1대로 살아가던 시절이라, 남편이 아이 스케줄 라이딩을 해주거나, 남편 또한 내가 마트 일을 시작하면서, 본인도 뭐든지 해보겠다는 용기를 얻었는지 나를 마트에 데려다주고 나면 본인도 '음식 배달' 알바를 했다. 그곳에서 마냥 다음 근무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일이 끝나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나를 바로 데리러 오지 못하면, 그냥 그곳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지나가던 동료들이,
"너 왜 아직도 집에 안 가?"라고 물으면, 매번, 약속이 있어서 누굴 기다리는 중이다, 남편이 데리러 오기로 했다 등등 여러 변명을 돌려가며 나 자신이 많이 비참하기도 했다.
또, 정해진 시간에 내가 얼마만큼의 쇼핑을 할 수 있는지 눈앞에 매트릭스로 보이는 결과에 대한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동안 못다 한 쇼핑에 대한 한을 푼다며 마치 보물찾기 하듯 즐거웠던 쇼핑이, 이 속도의 결과로 나의 생사가 갈린다고 생각하자, 안 그래도 성격 급한 나는 긴장감이 더 세져갔다. 무거운 카트를 밀고 긴장감이 치솟은 채 하루에 만보는 거뜬하게 걷자, 점점 무릎이 아파오고 당이 떨어지며 배고픔에 두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다. 배가 고팠지만, 당시에는 내 시급을 생각하면, 눈앞에 있는 음료수 하나 사 먹는 것도 너무 아까웠다.
사람이 많은 곳은 어디든 텃세가 있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어디든 존재했다. 그래도 나는 그들에게는 '갓 들어온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계약직'이었기에, 그들이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내 옆에서 자기들끼리만 신나서 웃고 떠드는 순간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다가가야 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친절하고 다정한 편이었지만, 미국이니만큼, 여러 이민자들이 한데 모여있어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다.
애써 밝은 척하며 어울리려 애쓰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같은 계약직들이 몇몇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말없이 일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본인도 계약직인 듯했지만, 피부색에 상관없이 원어민이었기에 기존 멤버 이상으로 날뛰는 사람도 있었다.
샤퍼로서의 일은 주로 내가 받은 오더에 대해서 쇼핑을 하지만, 고객이 물건을 찾으러 오면 임의적으로 그 일이 배정되어 내가 하던 쇼핑을 다른 사람이 이어서 받곤 했다. 난 이 순간이 가장 두려웠다. "90일의 평가 기간"에 의해서 나는 그야말로 "스페셜"로 동료들, 슈퍼바이저와 같은 리더들에 의한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서로 색깔이 다르잖아. 각각 담아야지, 함께 담으면 안 돼."
"이건 봉투에 담아야지."
"이렇게 무겁게 포장을 하면 백이 찢어지잖아." 등등, 누가 나의 쇼핑에 대해서 지적을 하거나 알려주면 혹시나 파리 목숨이 날아갈까 봐 뒷머리가 쭈뼛쭈뼛 서기도 했다. 그때도 웃는 얼굴로,
“아,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내 얼굴은 자동 웃음 반사기였다.
그러다가, 한 번은 평상시에 자기 친한 사람들끼리는 엄청 호탕하고 성격 좋아 보이지만, 반면 새로운 사람에게 강한 반감을 보이며 잔소리와 흉을 보는 한 늙은 아줌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Hey!"
나를 부르는지 몰랐다.
"(더 크게) Hey!!!!"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다가가자,
"너 이거 왜 봉투에 안 담아? 너 트레이닝 안 받았어?"라며 아주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당황스럽고, 기분이 너무 나빴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와 함께 나지막하게
"그거 내가 쇼핑한 거 아닌데요. 나도 누가 쇼핑하던 거 받은 거였어요."
라고 말하고, 얼른 그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러한 사소한 감정싸움이 종종 있었지만, 그걸 불평하는 건 내겐 사치였다. 또 반면, 나의 호의를 잘 받아주는 다른 이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내가 계약직을 통과하려면 나의 존재감을 알려야 했고, 누구보다 이곳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서 늘 이곳에 상주하며 90일간 주말도 언제나 근무 가능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보여 주기 위해 노력 했다. 대신 은근히 강한 노동강도로 피곤이 쌓여 생전 안 자던 낮잠을 자고, 집안에는 건조기에서 나온 빨래들이 쌓여가고, 작은 먼지가 그렇게 잘 보이던 내 눈이 내 발 앞에 종이봉투나 박스가 나뒹굴어져 있어도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번은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와서 나도 남편도 이래저래 피곤에 지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이따가 알바를 가기 위해 알람을 맞춰놓았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 8시 30분이 아닌가.
"어떡해!!! 애 학교지각이야!! 일어나!!"
남편은 당황해서 말도 안 나오는 듯,
"무슨 소리야! 아까 애 학교 보내고 왔잖아!"
놀래서 어쩔 줄 모르는 다급한 내 우렁찬 목소리에 남편은 더 놀래고 혀를 끌끌 찼다.
피로가 쌓이니 이명도 더 심해지고, 만성통증이던 무릎, 허리, 목의 통증으로 밤마다 연고를 바르고 파스로 몸을 도배해 나갔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아야 했다.
90일간, 내 프로필은 "오늘도 잘 버텼다." 미국 이민 생활과 계약직으로서의 내 삶의 애환을 녹여주는 그 한 마디.
스스로를 지켜준 그 한 마디로 90일을 잘 견뎌내었고, 그렇게 집순이 전업주부 아줌마의 바람은 시작되었다.
대문사진 : Jacob Owens,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