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보다 더 좋은 것
둘째의 유치원 하원 길,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지 유치원을 나오는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도 폴짝폴짝. 신발 바닥에 스프링이라도 달렸는지 아이의 몸이 계속 방방 뛰었다.
“시안아, 유치원에서 재밌는 일 있었어?”
“음.. 있었지! 이건 아주 기쁜 일이야!”
“뭔데? 엄마도 알려주면 안 돼?”
내 질문에 아이는 알려줄 듯 말 듯 비밀을 가득 품은 얼굴로 씩-웃었다.
“뭐냐면~ 우리 유치원에서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연극을 하거든~!”
“우와! 재밌겠다!”
“거기서 내게 뭐 하는 줄 알아? 바로~ 바로~”
아이의 표정이 이렇게 의기양양한 걸 보니 분명 주인공인 할머니 아니면 호랑이겠구나, 생각했다. 오~ 쑥스러움이 많은 아이가 웬일로 주인공을 맡았대? 내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찰나...
“개똥이야!”
“.. 뭐?”
“개똥~ 너무 멋지지?”
개똥이라니. 개똥....‘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책에서 개똥이 나왔던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는 잠깐 어리둥절한 상태가 되었다가 뒤늦게 한참을 웃었다. 내 기억으론 주인공인 할머니와 호랑이 말고도 자라, 멍석, 절구 등등 많은 역할이 있던 것 같은데.. 거기서 개똥이라니. 개똥 역할을 맡고 천진무구하게 웃는 딸아이가 마냥 귀여웠다. 대사가 뭐냐고 묻는 말에 아이는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대사는 기억이 잘 안 나. 근데 호랑이가 개똥을 밟고 미끄러지는 거야.”
“(설마 대사가 없는 건 아니겠지) 와. 개똥 너무 중요한 역할이네! 호랑이가 밟고 미끄러진다니!”
내 말에 아이는 웃으며 양팔을 활짝 폈다.
“야호! 난 진짜 멋진 개똥이 될 거야!”
아이의 모습은 마치 영화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가 배 난간에서 바다를 보며 외치는 장면과 흡사했다. 비록 세상의 왕과는 거리가 아주 먼 작디작은 개똥이었지만....
내 아이가 주인공이 되고,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은 역할을 받고 기뻐하며 즐기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주인공이 뭔 대수랴.
문득 몇 년 전 큰 아이의 공개수업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발표해 볼 사람?’ 하는 선생님 말에 아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었다. 눈은 자연스럽게 내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는 가만히 손을 무릎에 모으고 앉아 발표하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상아, 넌 왜 발표를 안 했어?”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온 아이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쑥스러웠다는 아이의 말에 ‘그럴 수도 있지’ 생각했지만, 그래도 애가 너무 쑥스러움이 많은 건 아닌가,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씩씩하게 발표 좀 하지, 하고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내 아이가 사람들 앞에서 씩씩하게 발표하고 주목을 받았으면 하는 엄마 욕심이 가득했다.
그때도 지금 같은 마음이었다면 좋았을걸. 발표가, 주인공이 다 뭐라고 속상해하고 아이에게 왜 발표를 안 했냐고 물었을까. 아이가 즐기지 못하고 원치 않는데 쏟아지는 시선이 좋을 리 없는데도.
아이는 꺄- 환호성을 지르며 나를 앞질러 저만치 뛰어갔다. 아파트 단지에 아이의 웃음소리가 쨍쨍하게 울렸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겠지. 모두가 주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지금처럼 즐기며 나아가는 어른이 되기를! 내 귀여운 개똥이.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