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게 그렇게 쏟아질 줄 몰랐습니다.
신입시절의 악몽
상품기획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신입에게 맡겨진 제품은 청소기였다. 사실, 집에서도 청소기를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는 살림에 대한 문외한이었는데, 나는 청소기를 깊이깊이 파기 시작했다. 보통 선배들이 선진 시장에 팔리는 청소기를 담당하고, 신입들은 중동, 아프리카 등의 판매가 아직 저조한 지역을 담당한다. 국가별 총매출은 크지 않아 여러 담당 국가가 상당히 많은 지역이었다. 그만큼 자잘하게 대응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뜻이다.
9월은 해외 거래선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열심히 준비한 신제품을 소개받고 내년의 물량을 협의한다. 그때는 상품기획자로서 신제품을 소개하는 미팅에 수시로 불려 간다. 영어로 된 스크립트를 항시 준비해야 한다. 그 주에는 러시아 거래선이 들어오는 날이었고, 나는 마침 전임자의 사정으로 일주일 전에 업무를 넘겨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의 담당지역인 아프리카에서도 크고 작은 거래선들이 들어오고 있었기에, 나는 완벽히 러시아 지역의 업무를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마침, 러시아 거래선이 아쿠아 청소기(브러시에서 물이 같이 나와서 물청소를 할 수 있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해당 제품에 대해서는 숙지가 덜 되어 있는 상태에서 나는 제품 소개를 위해 불려 갔다. 다른 선배님들은 제품 전시실에 붙어 있는 스펙 sheet의 내용만 설명하면 된다고 하여 나는 큰 준비 없이 미팅 장소로 향했다. 미팅은 순조로웠다. 이제 아쿠아 청소기만 보면 러시아 거래선의 미팅은 끝날 것이었다. 나는 아쿠아 청소기에 대한 소개를 하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거래선의 한 사람이 혹시 청소기가 뒤집어지면 물이 새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자신감 있게 당연히 새지 않는다고 친절히 청소기의 본체를 들어서 뒤집었다.
맙소사. 전무님, 상무님. 거래선들이 쳐다보고 있는 앞에서 청소기에 들어 있던 2리터의 물이 내 신발을 흥건히 적셨다. 나는 그럴 수만 있다면 저 청소기 브러시로 빨려 들어가고 싶었다. 그 이후 어떻게 수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잠금장치가 이상이 있었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던 것 같다. 그 뒤로는 그들을 다시 볼 수 없었지만, 아직도 같이 당황했던 전무님의 얼굴과 거래선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