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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먼트그래퍼 Dec 31. 2020

내 오렌지반쪽은 어디? Mi media naranja?

가우디의 블루그라데이션

호감가는 이성이 생기거나 소개팅 제안을 할 때 종종 이상형에 관한 질문을 한다.

“넌 이상형이 어떻게 되니?”

이 질문에 사람들은 보통 머릿속에 맴도는 몇 가지 외양이나 성격 정도를 말하곤 한다. 이삼십 대 시절 이 질문에 늘 나는 일관되게 내놓는 답이 있다.


“말만 번지르르한 문과 남자는 싫고, 단무지(단순무식의 줄임말) 공대생도 싫어.”

“둘을 반반씩 섞은 문과 감성이 뚝뚝 묻어나는 공돌이 스타일이랄까? ”

돌아오는 답변은 늘상 이렇다.

"네가 그래서 아직 솔로 신세를 면치 못 하는 거야”

라며 뜬구름 잡는 이야기 좀 그만 하라며 혀를 끌끌 차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현실의 바닥을 딛지 않은 채 공중부양하며 나만의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곤 했던 철부지 시절이 있었다. 대학 시절 검은색 기다란 도면 통을 어깨에 걸쳐 매고 다니는 건축학도를 눈으로 열심히 쫓은 적도 있었고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건축학과 남학생과 잠깐의 썸을 타기도 했던 것 같다. 화성에서 온 문과, 금성에서 온 이과라는 말이 있는 만큼 양쪽을 다 두루 갖춘 사람을 찾기란 당연 쉽지 않을 터.

여행지에서 조차 영화 ‘비포썬라이즈’의 에단호크와 줄리델피 처럼 기차나 비행기 옆 좌석에 누가 앉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그간 홀로 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어찌 한 번도 그런 만남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괜스레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을 정도.

누구든 여행에서 꿈꿔보는 것 중 하나가 로맨틱한 운명적인 만남일 텐데 그런 행운이 유독 내게 찾아오지 않다 보니, 만나지 못한 이상형을 여행지의 대표적인 인물에서 찾을 때가 있다. 스페인 여행에서 인문학적 상상력과 치밀한 기술력을 두루 갖춘 천재 건축가, 바로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와 사랑에 빠진 경우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여행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가우디 건축물 투어로 가우디의 작품을 따라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처럼 천천히 걸으며 여유롭게 가우디의 세계를 알아갈 수 있다. 다양한 건축물 투어 방식 중 많은 사랑을 받는 프로그램은 대중교통을 이용한 소규모 인원의 워킹투어로 여행자 개인마다 수신기를 지급해주고 무선마이크로 안내하는 정보를 들으며 가이드를 따라 도시를 누빈다. 가우디 뿐 만 아니라 까달루냐(바르셀로나 지역을 포함하는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 광역자치주) 역사 및 당시 경제독립 분쟁에 대한 국민투표 법안 이야기까지 인문사회학, 경제학이 버무려진 맛깔스러운 이야기가 더해지면 눈과 귀 모두 즐거워진다. 게다가 스페인 현지인들이 평소 평일에 먹는다는 메뉴델디아(menu del dia, 한국으로 따지면 오늘의 백반이란 뜻으로 합리적인 가격에 에피타이저, 메인요리, 디저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식사) 맛집도 소개받아서 먹방의 즐거움을 한껏 즐기는데 정신이 팔릴 뻔 했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을 독특한 건축물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게 된다.

나름 서유럽, 동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 다니다보니 서양의 건축물들에서 비슷비슷한 느낌을 받게 되지만, 가우디의 작품만은 첫인상부터 남다르다.

놀라움을 넘어 기괴한 인상을 받은 건축물은 단연 까사바트요(casa batllo)다. 건축물의 첫인상은 흡사 외계인이 지은 듯한 지구 밖 행성의 집 같다. 개관 당시엔 ‘뼈의 집’으로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용감한 기사가 악한 용과 싸우는 산 조르디 전설을 담고 건물 곳곳에 전설의 내용이 담겨있는 동화 같은 건물이다. 파랑, 초록의 색깔 세라믹은 용의 등을 연상시키고 뼈 모양의 기둥과 해골 모양의 발코니는 용에게 희생 당한 사람들을 상징한다.지붕의 곡선까지 용의 역동적인 기세를 표현한 듯하여 건물 구석구석 눈이 지루할 틈이 없다. 내부 또한 독특하다. 특히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있는 공간인 중정은 마름모 모양의 타일로 흰색과 하늘색으로 시작,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짙은 푸른색으로 이어지는 그라데이션 기법을 통해 흡사 바닷속을 탐험하는 느낌까지 연출한다. 창문 유리를 통해 보다 보면 일렁이는 바닷속을 형상화한 홀로그램 같기도 하다. 여기에 천장 쪽으로 밝은 자연광이 비치면 짙은 푸른색이 하단부의 명도와 자연스레 비슷해지는 효과까지, 가우디의 세심함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한 땀 한 땀의 장인 정신에 경이를 표할 뿐이다. 그의 건물엔 유난히 곡선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보면 볼수록 감탄해 마지않는 선의 향연이다. 산을 테마로 디자인한 까사밀라(Casa Milá)  역시 다채로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건물 어디에도 직선을 찾아보기 어렵다. 가우디는 가톨릭 신자답게 신을 닮고 싶어했던걸까. 그의 말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가우디의 말


건축투어의 마지막 정점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Sagrada Familia) 에 도착하면 뛰어난 예술작품을 보고 순간적으로 흥분 상태에 빠지거나 호흡곤란, 현기증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는 스탕달 신드롬에 빠진 것 같은 충격에 사로잡힌다. 가우디의 성당은 그간 보아왔던 유럽의 성당과는 사뭇 다르다. 유럽을 가면 반 아치 형태의 돔을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이거나 뾰족한 아치 형태의 탑을 갖고 있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을 많이 접하게 되다 보니, 성당 내부에 장식된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 화가들의 조각이나 프레스코 벽화 작품들을 일부러 보러 가지 않는 이상, 교회나 성당 건물 자체에 큰 감흥을 받기 어렵고 심지어 식상해지기까지 한다. 아예 종교가 없거나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외관은 멀리서 봐도 그 형태가 예사롭지 않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건축양식으로 외관만으로도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나선형의 높은 기둥으로 인해 키가 큰 야자수 나무 숲 속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독특한 조형미 때문에 고개를 위로 쳐들고 오랜 시간 감상하다가 수 십장의 사진까지 찍다 보면 목덜미가 뻐근해졌는지도 모른다.

이 위대한 창조물은 가우디가 31세에 첫 공사를 시작으로 43년 간 공사를 했지만 끝내 살아생전 완공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가우디 사망 100주년인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공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여러 예술가와 건축가를 통해서 그의 예술이 여전히 살아 숨시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

가우디는 하나의 설계도도 수백 번을 수정할 정도로 완벽주의의 건축가였다. 건축학교 학생 때부터 완벽주의자면서도 기존 건축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당돌하면서 독특한 학생이었다. 영감을 자연에서 많이 받은 가우디는 어릴 적 지중해 태양 아래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보던 나무, 꽃, 새소리를 모티브로 삼아 모든 작품에 자연을 표현했다. 그런 그의 건축양식은 기존과 너무나 달라 동시대 건축가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고 괴기한 건축물로까지 취급받기도 했다. 그의 유년시절 기록을 보면 폐병과 관절염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밖으로 뛰어나가기보다 집에서 조용히 지내는 아이였다. 본인만의 뚜렷한 가치관과 건축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주변에 어떠한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교수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릴 정도로 독창적인 학생이었던 그는 결국 전대미문의 건축가로서 대중에게 인정받기까지 묵묵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간 장인이다.

 - EBS 다큐프라임-안토니 가우디, 미완의 천재




내가 가우디에 대해 매력을 느꼈던 건 문과감성, 이과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만의 뚜렷한 세계와 투철한 장인정신이었을지도. 철부지 시절엔 내가 가지지 못한 면들을 이상형으로 언급하다 보면 그에 걸맞은 사람이 언젠가 되어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고 삶이 깊어질수록 공적이든 사적이든 사람을 볼 때 자신만의 색과 결을 갖고 있는 이에게 매력을 느낀다. 세상을 바꾸거나 위대한 작품을 내놓는 엄청난 ‘의의’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의미’로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삶을 공유하고 싶다. 그런 사람들끼리는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기는 자기력이 생겨 언젠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가우디 투어 이후 그런 생각이 더 나는 밤, 클라라 맥주(맥주와 레몬환타를 섞은 칵테일맥주) 한 잔 하며 센치한 감성이 깊어진다. 여행 오기 전 한 달 동안 배웠던 여행 스페인어 수업에서 ‘소울메이트’를 ‘오렌지 반쪽’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신기해 잊히지 않기도 했지만, 주말마다 강행군 수업으로 매주 단어 시험을 고되게 치렀던 이유에서인지 한 문장이 또렷이 떠오른다.


¿Dónde está mi media naranja?

(내 인생의 반쪽은 어디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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