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즈 강을 따라 런던아이(London Eye)가 보인다. 비행기 창문 밖으로 영국 런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녕 런던 하늘 상공을 날고 있는 것인가.
빗자루를 탄 해리포터가 날아오를 것만 같은 마법 도시를 상상하며 영혼은 이미 런던 시내를 걷고 있었다. 영국 히드로 공항(Heathrow Airport) 입국심사관과 마주하기 전까지.
“어디에서 머물 거야?”
“얼마 동안 런던에 있는 거야?”
"어디 어디 갈 거야?“
“런던아이에 왜 가고 싶은데?”
"무슨 일을 하고 있어?"
"비행기표 어떻게 산 거야?"
"티켓 결제한 카드 갖고 있어?"
"비행기표 얼마 주고 샀어?”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까다로운 입국심사관의 무한 질문 테러에 비행기 티켓 가격을 잘못 말하고 말았다. 긴장한 나머지 한국 화폐 ‘원’ 기준을 ‘달러’ 기준으로 바꿔 말하다 보니 단순 착오로 0 하나를 뺀 금액으로 말했을 뿐인데, 티켓 지불능력뿐만 아니라 내 존재 자체를 의심받는 느낌이었다. 영어실력이 미천하다 보니 여자 혼자 여행 온 게 영 미덥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고대하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국 여행을 문턱 앞에서 포기할 순 없었다. 짧은 영어 실력이지만 어떻게든 런던에 입국하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해 힘주어 답변했지만, 변함없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 연거푸 한숨을 내뱉게 된다. 입국을 허가해주지 않으려는 듯 팔짱을 낀 채 도도하게 서있는 그녀 앞에서 이젠 식은땀까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영국에서 쫓겨나는 것인가…”
입국심사가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려고 했는지 발을 동동 구른 지 한참이 지나서야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드디어 여권에 도장을 쾅! 찍어주는 것 아닌가.
간신히 그렇게 입국심사가 일단락되었다. 공항에서 한국으로 쫓겨나나 싶었는데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가장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를 입국심사대에서부터 거부당한 최악의 여행지로 기억될까 봐 겁이 났다.
예상치 못한 혹독한 신고식 후 그렇게 영국 여행은 시작되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안감에 휩싸인 채 여행을 시작한 것은 처음이었다.
런던에서의 첫날 스케줄은 오케스트라 공연 티켓을 예매하고 워터루 역에 들렸다가 런던브리지 역으로 가서 야경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원래 세운 계획대로 편하게 스케줄을 소화하고 싶었거늘, 입국심사관 덕분에 놀란 나머지 쉽사리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평소 계획한 대로 진행되는 여행을 선호하는 타입이라 예상치 못한 변수가 불쑥 끼어드는 것을 달가워 하진 않는 편이다. 요즘 유행하는 성격유형 지표인 MBTI 유형으로 보면 여행에 있어서 만큼은 J형이다. 계획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판단형이 J형이니까.
깐깐한 입국심사 덕분에 런던 시내로 입성하기까지 심리적 거리는 꽤 멀게 느껴졌지만 그것도 잠시, 히드로 공항에서 시내인 패딩턴 역까지 도착하는데 걸린 물리적 시간은 고작 15분 남짓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초고속으로 런던 시내까지 데려다 주다니. 세계 최초로 철도가 생긴 나라여서인지 빠르긴 빠르다. 지하철 역사에서 교통카드인 오이스터 카드(Oyster card)를 구매하고서야 진짜 여행을 승인 받은 것만 같았다. 물가 비싸기로 소문난 런던에서 오이스터 카드는 온종일 타더라도 높지 않은 상한액이 있는 마음씨 좋은 교통카드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유를 상징하는 파란색이 너무나 찰떡으로 어울리지 않는가.
런던 안개처럼 뿌옇게 드리워진 불안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런던 구석구석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지하철을 허락 받을 필요 없이 내 마음대로 누빌 수 있는 프리패스 카드다.
아무래도 J형 인간이 혼자 여행을 다닐 때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지하철이나 기차다. 지하철은 웬만하면 정해진 시간을 지켜서 운영하는 편이고, 노선을 잘못 타거나 반대 방향으로 가더라도 금세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의 또 다른 장점으론 이방인으로서 일상을 사는 현지인들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구경하는 것이다. 특히 런던의 지하철은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기 때문에 스마트폰에만 시선이 갇혀 있지 않다. 여행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묘미는 사람 구경 아니겠는가.
네 명이 마주보는 좌석들도 있어 오순도순 얼굴 보며 대화하는 사람들, 한 손에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출근하는 런더너, 조용히 각자 책이나 데일리 신문을 읽는 사람, 사색에 잠긴 사람, 지하철 통로의 연주자까지 인간미 넘치는 다양한 풍경들을 볼 수 있다.
런던 지하철만의 독특한 음성도 한몫한다.
“Mind the gap”
정차할 때 나오는 안내 방송으로 계속 반복되는 이 “마인더 갭, 마인더 갭” 발음을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한마디로 플랫폼과 열차 사이의 틈을 조심하란 뜻으로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승강장 발빠짐 주의가 종종 들리는 평범한 표현이지만, 그 당시 낯선 표현이라 궁금증을 계속 자아내기도 했고 매력적인 영국식 발음이라 색다르게 다가왔다.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다 보면 버스킹 하는 공연자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런던 지하철은 선발과정을 거쳐 인정받은 실력파 음악가들만 공연하게 하는 시스템이란다. 어두운 지하통로 분위기, 무거운 공기를 음악소리로 밝게 달래주고 있었다.
게다가 지하철 통로 벽면은 어떠한가. 전시장을 방불케하는 작품들이 화려하게 벽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얼굴없는 그래피티 화가로 유명한 뱅크시(Banksy)가 런던 지하철에 그림도 남길 정도이니, 음악과 예술을 표방하며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자부심을 뽐내며 뼛속까지 공공문화서비스에 대한 인식이 높은 런던의 이미지가 지하철에도 녹여져 있었다.
런던 지하철이 제공하는 다양한 재미 속에 이방인이지만 그 도시의 한 구성원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현지인 런더너처럼 런던이라는 도시의 찐 숨결을 느껴보는데 지하철 타기는 나름 괜찮은 여행 방법이었다.
나 홀로 입성한 런던에서의 첫날, 오이스터 카드 한 장을 손에 쥐고 서울 지하철 마냥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으려니, 입국심사관으로부터 호되게 치른 신고식의 상처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