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밸리 국립공원 - 미서부 캘리포니아
See you down the road.
영화 〈노매드랜드〉의 한마디가 바람처럼 스친다.
모닥불 앞, 세상을 떠난 스웽키가 좋아하던 돌멩이를 던지며, Bob wells가 조용히 그녀에게 남긴 말.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이라 믿는 미국 서부 노매드들의 이별인사는 언젠가 다시 길 위에서 보자는 약속이었다.
그 장면은 오래도록 내 안에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자본주의 현실 끝판왕, 라스베이거스의 눈부신 불빛을 뒤로하고 끝없는 황야를 두 시간쯤 달려 도착한 데스밸리(Death Valley) 그곳,
현실이 희미해지는 광활한 사막과 빛의 평원에서 그 장면이 다시 조용히 피어오른다.
‘데스밸리(Death Valley)’라는 이름에는 오래된 이야기 하나가 숨어 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시절, 금을 찾아 나선 탐험대가 길을 잃고 이 끝없는 사막을 헤매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바로
“Goodbye, Death Valley.”
그 절박한 외침이 오늘날까지 이 땅의 이름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특히 데스밸리 여행의 시작점이자 최고 전망지로 꼽히는 단테스 뷰(Dante’s View)는
이탈리아 시인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지옥을 연상시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심연을 내려다보면, 단테가 노래한 그 지옥의 풍경이 현실로 겹쳐지는 듯하다.
단테스 뷰는 가이드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가장 강력히 추천한 장소였다.
하지만 내 마음이 더 끌린 곳은 따로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소금의 대지, 배드워터 분지(Badwater Basin).
예전 인상깊게 다녀왔던 남미의 우유니 소금사막과 닮은 그곳을 직접 눈으로 마주하고 싶어,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그곳을 향한 작은 여정을 내 안에서 조용히 그리며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곳으로 향하던 길, 가이드가 전한 소식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그 말 한마디가 오늘의 여정에 뜻밖의 변주를 더했다.
“배드워터가 홍수로 폐쇄되었다구요?”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땅에서 홍수가 났다는 말에 순간, 무슨 농담인 줄 알았다.
사막이 너무 더워 잠깐 샤워라도 한 걸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끝없이 메마른 땅이 한순간 물에 잠기면, 도로를 삼켜버린다니—
그 모습이 마치 지옥의 신 루시퍼가 장난이라도 치는 듯했다.
하필 이런 타이밍이라니, 이럴 때 쓰는 말이 있다.
오늘의 뽑기, 완전 꽝이다.
순간, 가이드에게 “입장료라도 돌려주세요!”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차량이 해가 저물어가는 데스밸리의 자브리스키 포인트(Zabriskie Point)에 닿는 순간, 그 마음은 금세 사라졌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모든 아쉬움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눈부신 석양 아래, 층층이 쌓인 암석층이 각자의 색으로 빛을 품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부드러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마치 죄의 무게마다 형벌이 다른 지옥의 층계를 닮아 있었다. 대지는 바싹 말라 있고, 생명이라고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지구라니, 믿기 힘들 만큼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오죽하면 악명이 높아 이름 자체부터 '죽음의 계곡' 아니던가.
해가 서서히 능선 아래로 내려앉는다.
하루의 끝자락, 마지막 빛을 머금은 풍경은 천천히 붉게 물든다. 사그라드는 햇살 아래, 세상은 조금씩 색을 바꾸어 간다.
말 한마디 섞이지 않아도, 광활한 암석지대 위에 선 여행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고요함에 취해 있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번 여정은 그저 떠남이 아니라, 오랫동안 달려온 시간 속에서 묵묵히 버텨온 나에게 건네는 작은 쉼표이자 따뜻한 선물이었다.
긴 겨울을 지나 마침내 맞이한 햇살처럼, 조용히 걸어온 길 끝에서 피어난 자유와 평온이 석양의 붉은 빛결을 따라 서서히 마음을 채워나갔다.
태양이 완전히 몸을 숨기자, 하늘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부셨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장엄한 풍경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의 해방감을 천천히 새겼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삶도 어쩌면 이 풍경과 닮아 있는 게 아닐까.
빛이 사라져도 길은 이어지고, 태양이 저물어도 내일은 다시 떠오른다.
사라져가는 태양에게,
지나온 날들에게,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내일에게
영화 속 노마드들처럼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해가 완전히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자, 데스밸리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죽음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이곳의 시간은 조금도 멈춰 있지 않았다.
낮의 열기가 식자 별빛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바람이 살짝 스치면 언덕의 그림자들이 다시 살아 움직였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라, 그저 다른 형태의 시작이지 않을까.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미친 더위 속에서도 데스밸리 투어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며 무용담을 늘어놓던 가이드는 이번엔 스타게이징(별구경) 자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미국에서 별 보기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랍니다!”
실제로 데스밸리는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하늘을 가진 곳 중 하나라고 한다. 그 어둠 덕분에 별빛은 더 선명하고, 고요는 더 깊어진다나.
그러고보면 참 재밌고 신기한 곳이다, 데스밸리는.
이토록 혹독한 땅에서도 사람들은 결국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불볕더위는 누군가의 무용담이 되고, 깊은 어둠은 또 하나의 여행으로 이어지니까.
하지만 정작 그날 밤, 또 뽑기 실패다!
우리의 별구경은 이쯤되면 ‘머피의 법칙 투어’로 이름을 바꾸어야 할 판이다. 하필이면 1년 중 달빛이 가장 밝다는 보름달의 밤이라니.
별 대신 커다란 달을 주인공으로 모셔야 했다. 은하수를 기대했건만, 하늘 한가운데 달 한 덩이가 당당히 자리 잡고는 “오늘의 주인공은 나야, 나!” 하고 외치는 듯했다.
그 순간, 달사진 찍기의 원탑 갤럭시 폰을 든 일행이 괜히 부러워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수천 개의 별은 아니었지만, 머피의 법칙만큼은 완벽히 경험했으니까.
아쉬움마저 웃음이 되는 곳, 그게 바로 데스밸리의 묘한 매력이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