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가스와 키치는 찰떡궁합
“이 정도 열기면 sunny side up 하나쯤은 바닥에 그냥 구워지겠는데?”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뜨거운 햇살 아래, 나는 무더위를 달래려 혼자 중얼거렸다. 머리 한 켠에 밀어 두었던 egg 생각이 툭 튀어나와, 어느새 엉뚱한 상상으로 이어졌다. 아침부터 긴 줄 끝에서 겨우 영접한 에그슬럿(Eggslut)이 한국에서 철수했다는 소식때문에 이제 그 폭신폭신 스크램블 브리오슈 번 샌드위치와 슬럿을 먹으려면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사실이 꽤 아쉬웠던 모양이다.
라스베가스의 10월은 계절구분 상 가을일 뿐, 강렬한 햇살은 마치 태양이 한여름 휴가를 미처 끝내지 못한 듯 맹렬히 내리쬔다. 섭씨 30도 가까운 더위에 걷다 보면 이마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마치 오븐 안에 들어간 듯 공기는 뜨겁고 건조해서 살갗이 타들어갈 것만 같다. 머릿속에선 가수 비의 노래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 자동 재생되면서, 발걸음도 슬로우스텝으로 변하며 걷는 속도마저 느려졌다.
“울고 있는 나의 모습, 바보 같은 나의 모습~
환하게 비추는 태양이 싫어, 태양이 싫어~”
정말이지, 이 사막 도시의 햇살은 노래라도 부르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정도다.
썬글라스는 더이상 패션 아이템이 아니라 생존템이다. 너무 자주 써서 이제는 거의 피부의 일부처럼 착 달라붙어있다. 하지만 생존 스킬로 썬글라스와 노래만으로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결국 라스베가스에서 ‘태양을 피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파란 하늘은 포기하고 냅다 실내 천장 아래 인공낙원으로 뛰어드는게 정답!
호텔, 쇼핑몰, 카지노로 이어진 그늘진 세상 속으로 몸을 숨기면 그만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곳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으로 연결된 거대한 미로같았다. 한 건물에서 나왔다 싶으면, 곧장 다음 건물의 그늘과 에어컨 바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어느새 나는 뙤약볕을 피해 시원하고 쾌적한 공기를 찾아헤매는
라스베가스 사막도시의 한 마리 하이에나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호텔 몇 곳을 지나쳐 걷다가 어느새 윈 호텔(Wynn Las Vegas)의 에르메스(HERMES) 매장 앞에서 무심코 멈춰 서게 되었다. 눈길을 잡아끈 건 휘황찬란한 명품 스카프가 아니었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매장 바로 앞, 거대한 튤립 풍선모양의 조형물이다.
반짝이는 금속의 표면,
롤리팝처럼 과장되게 튀는 색감들,
어딘지 모르게 유치한 듯하면서도
매혹적인 키치(Kitsch)의 쇼!
“아! 이거 어디서 봤더라?”
순간 기억을 더듬으며 사진을 찍던 나는, 갑자기 머릿속에 전구가 켜지듯 반짝였다.
맞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폰다지오네 프라다(Fondazione Prada),
바로 그 프라다 미술관에서 봤던 제프 쿤스(Jeff Koons)의 ‘튤립(Tulips)’ 작품이었다.
2019년 여름, 유럽에서 직접 마주했던 작품이 이렇게 라스베가스 쇼핑몰 한가운데 앉아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알고 보니 라스베가스에 있는 이 또 다른 버전의 튤립은 라스베가스 호텔계 황제 스티브 윈(Steve Wynn)이 2012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화 약 370억 원에 낙찰받아 데려온 작품이었다는 사실! 게다가 이 튤립을 만든 제프 쿤스는 살아있는 작가 중 경매 최고가 기록도 보유 중인, 세계 미술계의 슈퍼스타다.
솔직히 내 취향은 최신 유행보다는 클래식한 올드 감성에 꽂힌다. 요즘 친구들은 NFT, 미디어아트, 난해한 설치미술에 열광하지만, 나는 여전히 클래식 음악을 듣듯 유화 작품 앞에서 감동 먹는 사람이다. 모네와 르누아르처럼 빛과 색으로 순간의 감정을 담아낸 작품 앞에 서면 마음이 설레고,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와 감정의 흔적에서는 숨이 멎는다. 앙리 마티스의 포비즘 작품 앞에서는 감정과 에너지를 담은 강렬한 색과 단순한 형태에 더 호기심이 생기는걸 어쩌겠나. 그래서였는지, 밀라노 여행 때 만난 튤립 작품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이 없었던 나였다.
하지만 현대미술의 아이콘인 제프 쿤스의 이 거대한 금속 튤립, 내 취향과는 좀 다르긴 해도, 반짝이는 금속 표면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셀프샷을 찍는 동안엔 그 화려함과 유치함이 뒤섞인 묘한 키치한 매력만큼은 즐길 수 있었다.
밀라노 프라다 미술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 라스베가스에서 다시 마주한 지금이나, 이 묘한 키치의 즐거움은 변함없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이런 게 바로 여행이 주는 작은 반전의 재미 아닐런지.
라스베가스에 제프 쿤스 작품이 있다는 게 어쩌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이 도시는 쇼의 도시답게 모든 게 과장과 화려함 투성이니까! 파리의 에펠탑과 개선문은 미니미 버전으로 설치되어 있고,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복제품으로 길거리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았다. 베니스 운하는 파란 인공 하늘 아래에 흐르고, 곤돌라가 여행객을 유유히 태우고 다닌다. 심지어 호텔 하나를 통째로 이집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바꿔놨다! 거리 한복판에선 런웨이급 패션과 노출이 겹치고, 미슐랭 스타 셰프의 레스토랑 이름이 유난히도 반짝인다. 무대 위에선 서커스 공연이 펼쳐지고, 네온사인과 광고판 불빛들은 밤낮 없이 깜빡거린다.
이렇듯 라스베가스는 진짜와 가짜, 고급과 저급, 예술과 상업이 뒤섞여 경계가 모호한, 키치 미학의 놀이터와 같은 도시다. 라스베가스와 키치는 찰떡궁합이 아닐 수 없다. 여행 중 이 미친 듯한 과장미 속에서 나도 모르게 키치의 마법에 빠져들고 말았다.
라스베가스 메인 스트립 호텔들을 하이에나 모드로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눈앞에 나타난 건 단순한 호텔이 아니라, 예술을 전면에 내세운 스티브 윈의 야심작들이었다. 윈은 단순한 숙박 공간이 아닌 자연스러운 갤러리를 만들어 손님들이 머무는 동안 예술 감상의 재미까지 챙기게 했다. 덕분에 만족도와 체류 시간은 물론, SNS 인증샷까지 늘어나는 효과 만점 전략! 이게 바로 계산된 예술 마케팅이란 거,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더라!
튤립 작품도 그렇지만, 벨라지오 호텔 로비의 유리꽃 작품은 그야말로 압도적 스케일이었다. 1998년, 유리공예계의 전설 데일 치훌리(Dale Chihuly)가 만든 ‘FIORI DI COMO’는 스티브 윈이 직접 의뢰해 탄생했다. 2,000여 개의 손으로 불어 만든 유리꽃이 18미터 높이 천장을 빼곡히 메우니, 로비가 아니라 유리별들의 무도회장이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다 목이 뻐근해져도 그 고통마저 즐거울 정도라니, 이게 바로 예술의 힘 아닌가 싶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으랴. 라스베가스는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장사꾼들의 도시다. 키치한 공간은 사람을 홀리는 법이다. 반짝임과 강렬한 색감, 과장된 유머에 정신이 팔리다 보면 어느새 지갑이 자동으로 열린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라스베가스에 가면 꼭 들러야 할 곳 중 하나가 바로 코카콜라 스토어, 이 곳 역시 그야말로 키치 마케팅의 교과서를 잘 따르고 있었다. 건물 외벽에 세워진 초대형 코카콜라 병 조형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일 때, 관광객들은 마치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그 앞으로 빨려 들어간다.
세계 14개국의 코카콜라 맛을 한 번에 시음할 수 있는 트레이 세트가 “도전해봐, 용자여!” 하고 우리를 유혹한다. ‘이게 다 콜라야?’ 싶은 의심도 잠시, 쌉T인 친구마저 호기심이 이성을 이겼다. 결국 단맛, 짠맛, 시큼한 맛, 약맛이 뒤섞인 그 혼돈의 맛을 한 모금씩 들이키며, 친구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도대체 왜 이걸 샀을까?”하는 묘한 후회와 웃음이 터진다.
키치는 이렇게 사람을 홀린다. 유치한 듯 화려하고, 허무한 듯 묘하게 즐겁다.
“이건 낭비가 아니라 경험이야.”라는 자기위안을 곁들인 채, 또다른 핫한 굿즈 앞에 서성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라스베가스의 마법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과장된 즐거움 속에서 나의 소비마저 예술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