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비싼 제자리 뛰기 1분

영화 속 포레스트검프가 멈춘 자리에서

by 모먼트그래퍼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비행기를 예매한 건 출발 딱 4주 전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여행을 ‘계획했다’기보다는 그냥 감정에 충실한 즉흥적 선택에 가까웠다. MBTI에서 파워 J 친구들이 보면, 아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듯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하필이면 추석 연휴라는 점!

전 국민이 해외로 쏟아져 나오는 바로 그 대이동의 시즌 아닌가.

게다가 올해 추석은 유난히 길어서, 여행자들에게는 거의 보너스 같은 황금연휴였다.

“지금 아니면 언제 가겠어?”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악명 높은 명절 성수기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미국 서부행 비행기 티켓 예약버튼을 눌러버렸다.


비싼 항공권을 보고도 이상하게 놀라지 않았다. “생각보다… 괜찮네?”라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요즘 뉴스만 켜면 등장하는 들썩이는 환율 때문인지 머릿속이 이미 달러 공포 모드로 세팅돼 있었던 모양이다. 비싼 가격을 계속 보다 보면, 조금만 덜 비싸도 그게 마치 세일처럼 느껴지는 법이니까.

성수기 항공권이 200만 원까지 치솟는 걸 봐와서 그런지, 내 티켓은 비교적 얌전하다 못해 착해 보일 정도였다. 이성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내 손가락은 이미 결제 버튼 위에 떨림 없이 올라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환율 뉴스와 성수기 공포 속에서 이미 살짝 중심을 잃은 경제 감각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미국행 스타트 라인에 섰다.


여행 준비를 하면서 가장 실감하게 된 것은 바로 트럼프의 존재감이었다. 현재 미국 뉴스의 움직이는 헤드라인 역할을 자처하고 계신 트럼프 대통령 덕분에, 우리는 모두 21세기 미국이라는 트랙 위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숨 가쁘게 함께 달리고 있지 않은가. 경제 뉴스, 정치 소식, 그리고 여행자로서 맞닥뜨리는 자잘하지만 확실한 현실들까지 모두가 하나의 끝없는 러닝 코스로 이어져 있었다.

문득, 내가 하는 일이 "미국 여행 준비"가 아니라 "트럼프 시대 마라톤 대비 훈련"이라고 말해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트랙 위에서 비행기 티켓 값을 비교하고, ESTA 비자를 신청하고, 투어 일정에 맞춰 호텔을 고르다 보니 하루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퇴근 후 틈틈이 준비하는 과정이 이렇게 숨 가쁠 줄은 몰랐다. 정신없이 달리는 듯한 느낌이 들 때마다, 광활한 자연과 길 위에서의 자유 같은 미국 서부의 여유로운 자연 이미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달랬다.


특히 모뉴먼트 밸리에서 갑자기 달리기를 멈춰 섰던 영화 <포레스트 검프> 주인공의 모습은 내가 기대하는 미국 여행의 감정과 꼭 닮아 있었다. 붉게 물든 끝없이 펼쳐진 적막한 풍경 한가운데서, 넓은 미국 대륙을 묵묵히 뛰어가던 검프는 "난 이제 집에 갈래"라며 긴 러닝 여정을 종료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이제 막 여행의 출발선에 서 있는 셈이다.

검프가 잠시 쉬었던 그 길을 내가 직접 달려볼 수 있다니! "인생샷 예약 완료"라는 생각과 함께 이미 내 영혼은 모뉴먼트 밸리 끝자락 도로, 포레스트 검프 포인트(Forrest Gump Point)로 날아가 있었다.

영화 포레스트검프 中

그러다 문득, 추석 연휴와 뒤늦은 여행 계획의 후폭풍이 떠올라 불안감이 스쳤다.

"과연 아직 현지투어 예약이 남아 있을까?"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래도 뭐, 투어 하나쯤은 남아 있겠지?"라고 중얼거린 뒤, 나는 여행 플랫폼 앱인 마이리얼트립을 열었다.

추석연휴의 무게가 핸드폰 화면 너머로 느껴졌다. 마치 라스베이거스 슬롯머신이 비웃듯 말했다.

“아직도 자리가 있을 줄 알았어?” 하지만 포레스트 검프도 포기하지 않았다. 달리다가 지쳐도 계속 달렸다.

나도 달려야 했다. 챗봇 메시지창으로.


나는 여러 현지투어 업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포레스트 검프 포인트 방문하는 상품인가요?”

“추석 연휴라 이미 마감인가요?”

“모객 확정 일자는 언제인가요?

“혼자라면 싱글차지는 얼마예요…?”

그리고 도착한 답장은 대부분 비슷했다.

“추석 연휴 기간이라 거의 마감 상태라 원하시는 일자엔 자리가 없어요.”

“3박 4일 상품에만 포레스트검프 포인트 포함이고, 싱글차지 1일당 80불씩 붙어요”


나는 1인 여행자였다.(여행 알아보는 그 당시엔 그랬다. 여행 출발 직전 다행히 동행을 구했지만^^v)

싱글 차지라는 덫이 이미 나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출발 가능 여부조차 불투명하다니.

그러던 중 한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운 좋게 1박 2일짜리 상품이었다. 2박 3일 같은 가성비 끝판왕으로 짧고 굵게 모험할 수 있는 1박 2일 상품이라며 자랑을 하는 투어였다.

“혹시 이 날짜는 어떠세요? 예약 가능하시면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 단, 1인실 추가금 있으세요.”

상품소개 내용 스크롤을 내리던 중, 빼곡하게 적힌 작은 글씨 속에서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포레스트검프 포인트(Forrest Gump Point) 포함”

싱글차지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바로 예약 링크를 눌렀다.

결국 나는 고난을 뚫고 포레스트 검프 포인트 포함 투어 예약에 성공했다.

확정 문자를 받았을 때의 기쁨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잭팟을 터뜨린 기분과 다름없었다.(한 번도 잭팟을 터뜨려 본 적은 없지만, 느낌은 그랬다.) 예약은 무사히 성공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묘한 긴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존 F. 케네디 암살처럼 미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무심히 지나친 포레스트 검프처럼, 나도 트럼프 시대의 굴곡을 피해 잘 여행할 수 있을까?

여행 직전 LG에너지솔루션 한국인 파견근로자 구금 사건은 마무리됐지만, 트럼프의 강경 정책 덕분에 ESTA 입국 심사나 치안 문제, 셧다운으로 인한 국립공원 폐쇄와 항공편 지연까지… 신경 쓸 거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걱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조종할 수 없는 세상의 트랙이라면, 텅 빈 모뉴먼트 밸리 도로 위에서는 그저 내 발자국을 남기는 그날의 행복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밟고 서 있는 끝없이 펼쳐진 길과 따스한 햇빛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현실적인 21세기 미국일 테니까. 포레스트 검프가 그랬듯, 이 길의 끝은 복잡한 세상이 아닌,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이게 웬일인가. 투어 상품 소개서의 약속과는 다르게, 가이드는 최근 교통사고 때문에 포레스트 검프 포인트에는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무엇을 고르게 될지 알 수 없단다."

포레스트 검프의 어머니 말씀은 그에게는 위로였겠지만, 내게는 예측 불가능한 실망을 안겨주려는 듯했다. 심지어 가이드는 무리한 일정을 소화시키려고 약속된 장소를 자꾸 슬쩍슬쩍 변경하려는 듯했다.

어렵게 고른 상품을 이렇게 허무하게 포기할 수 없었다. 가만히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분 나쁘게 따질 수도 없으니, 결국 가이드에게 다가가 최대한 간절함을 담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꼭 가게 해주세요! 상품 소개에 분명히 나온 장소잖아요!”

나의 절실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가이드는 결국 포인트 방문을 취소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 안도가 무색하게도, 막상 도착해 보니 가벼운 조깅은커녕 겨우 1분짜리 제자리 뛰기로 마무리될 줄은 몰랐다.

가려고 하지 않았던 가이드의 처음 태도와는 달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투어 멤버 전원의 점프샷 하나하나를 정성껏 찍어주었다.

러너라면 누구나 쉽게 뛰는 서울 여의도 '고구마 런' 7.7km 코스를 평균 8-9 페이스로 뛰는 초보 러너이긴 하지만, 한때 11km 대회에도 나가볼 만큼 러닝에 관심이 있는 나였기에 이 상징적인 장소를 고작 몇 분 만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포레스트 검프 포인트에 꼭 가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주저하지 말고 렌터카 여행을 추천한다. 차를 적당한 pull-out(갓길 주차 존)에 세워두고, 도로 옆 비포장 흙길이나 어깨길을 살짝 걸어가거나 조깅하면, 괜히 영화처럼 한가운데를 질주하다가 현지 운전자들의 심장 박동을 불필요하게 올리는 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 관광객과 차량이 한숨 돌린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에 방문하면, 드넓은 고원과 붉은 바위가 만들어내는 영화 같은 풍경을 훨씬 낭만적이고 안전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아쉬움? 물론 남는다. 오늘의 코스가 ‘포레스트 검프 포인트 제자리 뛰기’로 끝났다고 해서 여행이 망한 건 아니다. 러닝도 마찬가지 아닌가. 늘 피치 못한 오르막, 예기치 못한 신호등, 갑자기 등장하는 강아지 산책러들이 코스를 흔들어놓지만, 결국 남는 건 기록이 아니라 기억이다. 계획대로 뛰지 못한 대신 가이드의 투박하지만 정성 어린 점프샷이 남았고, 그 사진 한 장이 나중에 보면 이 여정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게 해줄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진짜 완주는 그 점프샷 속 0.1초의 체공 시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행도 러닝처럼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어쩌면 여행은 완벽한 순간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구멍들을 웃으며 채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러너에게 아쉬움은 거의 필수 영양소, 곧 다음 레이스의 동력이다. 내 여행의 GPS는 아직도 ‘코스 진행 중’이라고 똑똑히 표시하고 있고, 다음 목적지는 여전히 나를 향해 깜빡이며 기다리고 있다. 나의 미국 여행도 포레스트 검프처럼 느긋하게 나만의 페이스로 계속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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