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브라이스 캐년에도 월스트리트가 있다
세상에는 이름이 대상을 오해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Seahorse(해마)는 말이 아니다.
그저 말처럼 생겼을 뿐인, 아주 작은 물고기일 뿐이다.
Starfish(불가사리) 역시 물고기가 아니다.
별 모양을 한, 전혀 다른 생물이다.
지도 위에서도 이런 이름의 낚시질은 계속된다.
Greenland(그린란드)는 이름처럼 초록빛 섬이 아니라 거대한 얼음 덩어리이고,
Death Valley(데스밸리)는 이름과 달리 생명들이 살아가는 땅이다.
Wall Street(월스트리트)는 어떤가. 이름에는 분명 '벽(Wall)'이 있지만, 정작 그곳에 가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옛날의 식민지 시절 세웠던 그 성벽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돈과 정보가 흐르는 길만 있을 뿐.
이름이란 종종 설명이 아니라, 일종의 유머나 아이러니이기 때문이다.
"Because no river runs through it, Bryce Canyon is not truly a canyon."
(강이 흐르지 않기에 브라이스 캐년은 사실 캐년이 아니다.)
처음 안내문의 이 문장을 보고 멈칫했다. 이름은 분명 협곡(캐년)인데 협곡(캐년)이 아니라니,
브라이스 캐년 역시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는 격으로, 일종의 말장난이자 반전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이유가 이어졌다.
"Instead it is a series of natural amphitheaters carved into the edge of the Paunsaugunt Plateau." (대신 이곳은 Paunsaugunt Plateau 끝자락을 깎아 자연이 만든 원형극장들이 줄지어 있는 지형이라는 것이다.)
꽤 흥미로운 설정이다.
사람이 돌을 쌓아 올린 원형극장 대신,
자연이 바람과 비를 조각칼 삼아 수백만 년 동안 빚어낸 거대한 무대라니.
그곳이 바로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Bryce Canyon National Park)이다.
'자연 원형극장'이라는 단어를 곱씹자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졌다.
둥근 객석,
중앙의 모래 경기장,
그리고 그 아래 숨겨진 통로들.
함성 소리가 들리는 화려한 극장 뒤에는
늘 보이지 않는 무대 뒷골목이 존재한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붉은 돌기둥 사이로 이어진 길을 내려다보는데, 방향 안내판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월스트리트(Wall Street)'.
안내판에서 '월스트리트(Wall Street)'라는 글자를 보았을 때,
나는 당연히 뉴욕의 그 금융가를 떠올렸다.
어라? 여기는 미국 서부의 한복판인데 웬 뉴욕 월스트리트인가 싶어 잠시 갸우뚱했다.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브라이스 캐년의 월스트리트는 이름 그대로, 거대한 돌기둥 마천루 사이를 걷는 좁고 긴 골목 같은 길이었다. 뉴욕 월스트리트가 돈의 흐름을 쫓는 '금융의 협곡'이라면, 이곳은 수만 년의 세월이 빚어낸 '돌기둥의 협곡'이랄까.
뉴욕에선 돈이 오가지만, 이곳에선 바람이 오갈 뿐이다.
브라이스 캐년이 거대한 자연 극장이라면, 이 길은 관객석에서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배우들의 통로 같았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그 길을 따라 그 길의 속살로 파고들어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가이드는 우리를 전망대로 불렀다.
가이드의 손짓에 내 호기심은 붉은 모래 위로 사그라들었다.
'선셋포인트(Sunset Point)'.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곳은 브라이스 캐년에서 가장 상징적인 자리니까.
사람들은 자연 원형극장의 가장자리에 일렬로 서서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마치 공연장 객석에 앉아 무대를 기다리는 관객들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팔을 벌리고, 누군가는 공중으로 점프를 하고, 또 누군가는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그리며 저마다의 관람 인증샷을 남긴다. 모두가 같은 장면을 바라보며, 정해진 배역이라도 있는 양 약속된 포즈를 곁들일 뿐이다.
하지만 내 시선은 자꾸만 발아래, 무대 깊숙한 곳으로 미련을 던졌다.
바로 '나바호 루프 트레일(Navajo Loop Trail)' 하이킹 코스이다.
월스트리트 구간을 품고 있는 이 길은, 객석에서 보던 풍경 속으로 관객을 직접 뛰어들게 만드는 브라이스 캐년의 백스테이지 입구다. 붉은 돌기둥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 그 길로 내려가면, 풍경의 온도부터 달라질 게 분명했다.
바위틈에 고인 서늘한 그늘,
발밑에서 바스락거릴 붉은 모래,
그리고 고개를 90도로 꺾어야 겨우 보일 좁은 하늘.
그곳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림 같은 브라이스 캐년과는 전혀 다른 진짜 세계일 것이다.
그 속살을 아주 잠깐이라도 훔쳐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지투어 여행의 필수 준비물은 고성능 카메라도, 접지력 좋은 등산화도 아니다.
바로 냉정한 시간표다.
"자, 이제 이동합니다!"
가이드의 외침은 마치 공연이 끝났으니 퇴장해 달라는 안내 방송처럼 단호했다. 월스트리트 입구에 발을 담가보기도 전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셔터를 누르고, 시계를 확인하고, 흩어진 일행을 모아 다음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한다.
투어의 시간표는 여행자의 사소한 호기심 따위는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다.
나는 브라이스 캐년이라는 거대한 자연 극장에서,
무대를 누비는 주연 배우가 아니라
가장 명당자리 객석에 앉아 하이라이트 장면만 관람하는 1열 관객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런 식의 관객 모드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뉴욕 월스트리트에 갔을 때도 그랬다. 상승장을 상징하는 '돌진하는 황소(Charging Bull)' 동상 앞에서 행운을 잡겠다고 뿔이며 엉덩이를 만지며 인증샷을 남기느라 바빴지, 정작 진짜 월스트리트의 깊숙한 골목은 제대로 밟아보지도 못했다.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콜로세움의 거대한 관객석에 앉아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감탄했지만, 정작 검투사와 맹수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을 지하 통로 '히포게움(Hypogeum)'은 끝내 내려가 보지 못했다.
이처럼 유명한 장소에는 언제나 가장 유명한 자리가 있고, 투어 여행자는 그곳에서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 한 장 남기고 떠나는 엑스트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곤 한다.
"현지투어 여행은 왜 항상 2% 부족할까?" 하는 아쉬움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지만,
사실 그 부족한 2%가 여행을 지속하게 만드는 연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해, 현지투어 프로그램은 생각보다 꽤 영리한 방식이다. 적어도 정해진 코스대로 깃발만 따라가는 빡빡한 패키지 여행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효율은 챙길 수 있으니까.
운전대를 붙잡고 씨름할 필요도, 낯선 길 위에서 구글 지도를 보며 헤맬 일도 없다.
가이드는 가장 인상적인 풍경 앞에서 “자, 여기가 포인트입니다!”라며 . 핵심만 콕 짚어주니까.
우리는 그저 준비된 장면에 감탄하고, 편안하게 즐기면 그만이다.
어쩌면 현지투어 프로그램은 어느 도시의 진미를 정독하는 ‘풀코스 정식’이라기보다, 가장 맛있는 부위만 쏙쏙 골라 맛보게 해주는 ‘시식 코스’에 가깝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오늘 브라이스 캐년이라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하이라이트만 모아놓은 아주 화끈한 예고편을 맛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이 아쉬움을 구태여 털어내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명당 객석에서 공연의 절정을 감상한 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면,
그때는 관객석을 박차고 일어나 저 붉은 돌기둥 사이의 골목을 배우처럼 천천히 거닐어볼 것이다.
어쩌면 투어 여행의 진짜 가성비는 모든 골목을 다 훑는 완결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 거기 못 가본 게 아쉽네”라며
다음 여행을 위한 기분 좋은 핑계를 하나씩 쟁여두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미련이 남았다는 건, 다시 올 이유가 생겼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