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점의 세계—얼리버드가 룰을 지배한다

미국여행에서 목격한 폴대의 자본주의

by 모먼트그래퍼

"먼저 깃발을 꽂는 놈이 임자다! "


미국식 땅따먹기 역사의 핵심은 결국 정보력과 무자비한 선점이었다. 이 단순무식하면서도 처절한 룰은 아메리칸드림의 화려한 정점이자, 동시에 누군가를 밀어내야만 생존하는 냉혹한 정글의 법칙을 그대로 보여준다.

놀랍게도 21세기 미국 애리조나 주의 붉은 모래바닥에 박힌 나무 안내판 하나가 바로 그 야생의 룰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이곳은 앤탤롭 캐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애리조나주 페이지 마을(Page Village, Arizona)의 숨은 보석이라 불리는 '비디 더 아치(Biidi the Arch)'이다.

원래 투어 일정에도 없던 이곳을 정신이 비몽사몽한 새벽부터 찾아갔다가 시간이 없어 발길을 돌렸던 터라, 가이드의 마음속엔 못다 핀 미련이 잔뜩 남았던 모양이다.

결국 첫 일정인 앤탤롭 캐년 투어를 마치고 오전 9시 반쯤, 다시 이곳에 당도했다.

주유소 주차장 뒤편, 사암과 모래가 섞인 황량한 풍경을 보며 "대체 어떤 보물이 숨어있길래?"라는 설레는 기대감으로 발을 내딛고 가이드를 따라나서는데—

나를 반긴 건 아치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삭막한 경고의 글이었다.

영화 <Far and Away> 포스터 , 톰크루즈&니콜키드먼


대포 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순간, 수 만 명의 인파가 미친 듯이 광야로 질주해 말뚝을 박고 "내 땅!"을 외치며 톰크루즈와 니콜키드먼이 현실판 땅따먹기를 보여주던 영화 <파 앤드 어웨이, Far and away>의 오클라호마 랜드 러시(Oklahoma Land Rush) 장면이 이 게시판 위로 오버랩되었다.


게시판의 내용인즉슨, "우리 땅을 밟는 순간 법적 책임을 묻겠다 “ 였다.


놀랍게도 어떤 한인투어 업체의 서슬 퍼런 선전포고다. 아치로 가는 길목에 사유지라고 기재되어있고 해당 한인 업체가 소유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SNS를 통해 관광 명소로 유명해지면서 많은 한국인 투어 업체들도 코스에 포함하여 영리를 추구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참여한 투어 업체의 이름이 그 경고문에 버젓이 적혀 있었다. 19세기의 총칼 대신 21세기의 법적 대응이라는 무기를 들었을 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그 처절한 땅따먹기는 현재진행형으로 느껴졌다.

긴 폴대와 무단침입 금지 표지판이 포토스팟으로 향하는 길목을 덩그러니 홀로 지키고 있었다.


역시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은 미국인가 보다. 이곳에서 사유지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고, 땅 주인의 권위는 때로 대통령보다도 무섭다. 아치가 아무리 아름다운 공공의 보물이라 해도,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 1cm만 잘못 밟아도 무단 침입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이 붙는 것이었다. 아치 자체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공의 자연물이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에 폴대를 박는 순간, 그 뒤에 숨은 풍경은 선점한 자의 상품이 된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21세기 애리조나 페이지마을에서 부활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까?

주유소 뒷마당의 암반에 폴대 하나 꽂았을 뿐인데, 그것이 법적 강제력을 가진 철옹성이 되어 투어의 흐름을 지배하고 있었다. 본래 원주민의 영토에 무단 침입한 이들은 다름 아닌 미국의 이주민들이 아니었나. 아메리칸드림의 이면에는 이토록 영악하고도 처절한 현대판 봉이 김선달의 상술이 공기처럼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앞장서던 가이드가 바위에 박힌 철근 폴대를 가리키며 약간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여러분, 저 철근 폴대 너머로 발을 들이시면 안 돼요. 저 폴대 넘는 순간, 우린 여행객이 아니라 침입자가 되는 거예요. 모래사장 쪽 말고 바위 쪽으로 따라오세요."


순간, 속으로 ‘에이, 설마 이 허술한 막대기 하나 넘는다고 정말 무슨 일이야 나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여긴 한국의 인심 좋은 골목길이 아니라, 총기 소지와 소송이 일상인, 말 그대로 리얼 아메리카다. 비록 사암 바닥에 대충 꽂아둔 깃발처럼 보일지라도, 미국 법정에서 이 폴대는 명확하고 단호한 경고로 인정받는 철벽의 경계선이다. 몰랐다거나 살짝 넘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이주민들의 말뚝 박기 정신이 한인 이민자에게도 21세기형으로 진화한 유물이자, 미국의 DNA이었을까.

이 선전포고를 날린 주체가 다름 아닌 한인 투어 업체라는 사실이 꽤 묘하게 다가왔다.

타지에서 온 이방인이 이 척박한 애리조나 사암 언덕에 뿌리를 내리고, 폴대를 박으며 자신의 권리를 외치는 모습. 그것은 과거 오클라호마 벌판을 달리던 이민자들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단순히 야박하다고 치부하기엔, 그 한인 업체 역시 거친 미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국식 생존 문법을 완벽하게 체득한 현대판 개척자들로 봐야 할지도.


아치라는 거대한 자연물 자체가 어느 개인의 소유라기보다는 인디언 나바호 부족 보호구역(Navajo Nation)의 공공 자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유지임을 경고하는 경고 안내판이 눈에 밟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어 가이드는 따라오라 손짓하니, 여행자로서는 도무지 알쏭달쏭한 불안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분쟁이 일상인 이 거친 구역에서 여행자로서 살아남는 상책은 오직 하나, 그 경계선을 절대신성의 영역으로 대우하며 가이드의 발뒤꿈치만 필사적으로 쫓는 것이었다. 왠지 모를 지뢰밭을 걷는 듯한 묘한 긴장감에 유료카펫 같은 모래사장과 꽤 거리를 둔 채, 저 너머의 보물을 향한 위태로운 행진을 이어갔다.



현대판 랜드 러시의 경계선을 따라 이어진 짧은 행진 끝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풍경은 예상 밖이었다. 긴장하며 사유지 논란의 선을 타던 우리와 달리, 그곳엔 투어 상품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개인 여행자들이 저마다의 기록을 남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의 여유로운 모습 앞에 서니 의구심이 솟구쳤다. 왜 유독 한인 투어 가이드만이 이토록 엄중한 경고를 남기며 우리를 안내해야 했을까? 투어 깃발을 들지 않은 저 개별 여행자들은 이 소유권 분쟁의 굴레에서 정말 예외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무지의 특권으로 그 경계선을 유유히 넘나드는 것인지, 개인 여행자들은 일일이 단속하기 어려워 방치하는 걸일까.


묘한 허탈감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거대한 사암이 빚어낸 모래 동굴이 침묵 속에 나를 맞이했다. 엄밀히 말하면 깊숙한 동굴이라기보다 거대한 사암 절벽이 세월에 깎여 만들어진 아치형의 움푹한 공간이었다. 앤텔롭 캐년을 닮은 주황색과 붉은색의 사암 줄무늬가 벽면을 타고 흐르는 모습은 확실히 예사롭지 않았다.


수만 년의 세월 동안 바람과 모래가 깎아내린 이 천연의 요새는, 밖에서의 이권 다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동굴 안으로 스며든 빛이 붉은 사암 벽면에 닿아 부드러운 오렌지빛으로 산란하고, 발밑에 닿는 미세한 모래의 감촉은 마치 흐르는 시간의 입자를 밟는 듯했다.

인간들이 그어놓은 얄팍한 경계선 밖에서, 자연은 여전히 자신만의 질서로 이 거대한 보물을 묵묵히 깎아내고 있었다.


이곳의 백미는 따로 있었다. 동굴 안쪽 깊숙한 곳에서 입구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으면, 거대한 아치가 천연 프레임이 되어 하늘과 사암이 어우러진 신비로운 실루엣을 선사했다. 그 포토존에서 한 장을 건지기 위해 사람들은 마치 배급이라도 기다리는 양 일렬로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숨은 보물치고는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이 보물지도를 들고 찾아온 셈이다.


우리 팀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다. 개척자들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달렸다면, 지금의 여행자들은 인스타그램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인내심을 시험받고 있었다.

가이드가 팀원 한 명 한 명의 정성스러운 포토샷을 남겨주느라 대기 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 틈을 타 슬며시 딴생각에 빠져들었다.


‘기대보다 과대평가된 곳’, ‘입장료가 무료인 딱 그 정도 수준의 관광지’라는 냉소적인 구글 리뷰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심지어 이곳은 일몰과 별빛배경 사진이 훨씬 아름답다는데, 쨍한 오전 10시의 햇살 아래서 과연 최적의 선택인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 황무지 같은 모래 땅과 포토존이
과연 그토록 야박한 선전포고와 기다림을 감내할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답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발밑의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모래놀이로 기다림을 견뎌낼 뿐이었다.



사실 동행과 투샷만 찍고 대충 퇴장하려던 소박한 계획은 가이드의 불타는 디렉팅 앞에 무력화되었다. 그의 강권에 못 이기는 척 아치 프레임 한가운데로 몸을 밀어 넣는 순간,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화보 촬영이라도 온 모델처럼 포즈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나의 무대가 열렸다.

It’s Show Time!

"자, 여기 보시고! 하나, 둘, 셋!" 소리에 맞춰 점프샷을 날리는 순간, 나는 비로소 여행자의 본업 모드로 완전히 복귀했다.


방금 전까지 사유지니 뭐니 하며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생각하던 여행자는 어디 가고, 중력의 법칙마저 무시한 채 공중에 떠 있는 여행자 한 명만 남았다.

랜드 러시의 선점 경쟁 부럽지 않은 열정으로 공중 부양 점프샷까지 날리고 나서야 그곳을 빠져나왔다.


결국 이 땅의 룰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개척 시대의 거창한 땅따먹기나 한인 업체의 경고장까지 깊게 파고들 것도 없었다. 그저 새벽잠 설쳐가며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이 아치 밑에 당도한 그 부지런함이 곧 이곳의 정의이지 않았을까.

만약 이 새벽잠마저 포기했더라면?

아마 나는 아치 근처엔 발도 못 붙인 채, 투어 팀원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는 민폐 캐릭터, 빌런 1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선점의 세계에서 지각은 곧 패배이기 때문이다.


비록 수면 시간은 바닥을 찍었고 무릎은 후들거리지만,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통제권을 쥐는 길목 자본주의의 정수를 확실히 체험했다. 아메리칸 봉이 김선달이 설계한 이 기묘한 폴대의 자본주의 속에서, 그림 같은 아치 점프샷이라는 지분 한 조각까지 야무지게 챙겨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음 목적지를 향한다.


자, 이제 기력을 보충하고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러 가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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