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순간
스무 살 무렵, 유성에 있는 한 편의점에서 야간알바를 했다. 유흥가의 심장부쯤에 위치한 편의점이었다. 가끔 살짝 친해진 모텔 지배인들이 병맥주를 사가며 가격표를 떼 달라 하기도 했고(그런데 그땐 맥주마다 가격표가 붙어 있었나? 왜 이런 기억이 있지?), 새벽녘에 일이 끝난 언니들과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일인데, 유투의 [zooropa] 카세트가 편의점 매대에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즐겁게 일했다. 그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즐거웠고, 자정이 되면 막 유통기한이 끝난 음식을 먹는 재미, 각종 잡지와 신문을 읽는 재미도 좋았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 수 있어 좋았다. 거의 대부분 내가 선곡을 했는데 헤비메탈 이런 건 잘 안 틀었고 적당히 즐길 수 있는 가요와 팝을 주로 틀었다. 음악을 들으며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 거리를 보는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늘 새로웠다. 그 새로운 순간에 우연히 윤상의 <새벽>이 흘러 나왔다. 음악과 풍경이 딱 맞아 떨어지던 음악의 순간. 별 것 아닌 일인데도 그때 그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이제는 <새벽>의 종소리 같은 도입부만 들으면 자연스레 모든 유흥이 끝나고 한적해진 새벽의 희뿌연 유성 거리가 떠오른다.
누구에게나 이런 음악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한 음악가의 회상이 들어있는 책을 읽다 문득 이런 음악의 순간을 기록해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난 '회상'이라는 것에 무척 약한 편이다. 음악의 순간을 회상하는 거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주변의 풍경과 시간과 나라는 존재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던 음악의 순간을 기록해두려 한다. 음악가일 수도 있고, 음악관계자일 수도 있고, 음악애호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음악과 그 음악이 전해주던 특별한 순간을 경험했던 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 김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