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순간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무조건 12시까지 야자를 했다. 의무적으로 잡혀있어야 했는데, 그때 나를 키운 8할은 전영혁 선배님 방송이었다. 음질이 좋다고 해서 크롬 테이프나 일본 TDK 테이프 천 개를 사서 날마다 모든 방송을 녹음해가며 들었다. 팻 메시니나 필 만자네라 같은 생소한 아티스트도 그 방송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됐다. 오잔나의 <Canzona (There Will Be Time)>도 그때 처음 들었다. 그날 눈이 무척 많이 왔는데 그 곡을 처음 들었다. 듣는 순간 눈이 오는 배경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일부러 길을 돌아서 갔다.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길이었는데 언덕길로 돌아가면 40분 정도가 걸렸다. 처음 들은 그 노래가 너무 좋아서 제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노래 제목을 잘 못 알아들었고 또 하필 그때 테이프가 끊겨서 노래 제목을 말해주는 부분이 녹음이 되질 않았다. 전영혁 선배님 방송은 똑같은 노래가 잘 나오지도 않지 않나. 똑같은 노래 선곡 로테이션이 긴 편이라 노래 제목은 너무 알고 싶은데 알아낼 방법은 없고, 그때 같이 놀았던 예바동(예술바위동호회) 형들한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습관처럼 테이프로 녹음을 하면서 방송을 듣는데 그 노래가 다시 나온 거다. 그때 기분은 정말이지...(웃음) '이번엔 꼭 제목을 알아야지' 하면서 듣고 있는데 전영혁 선배님이 마지막에 "오잔나의 <Canzona (There Will Be Time)>이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멜로디가 너무 좋아서 각인되는 노래들이 있는데 나에겐 오잔나의 <Canzona (There Will Be Time)>이 그런 노래였다. 이후에 내가 성인이 돼서 사실 어느 정도 존재를 잊고 있었는데 내한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예매를 하고 공연을 봤는데 이 노래가 흘러 나왔다. 마술처럼 내가 고등학생 때 눈 내리는 길을 빙 돌아서 걷던 풍경이 다시 내 눈 앞에 펼쳐졌다. 한국에선 절대 라이브로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노래를 내 눈 앞에서 시연해주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특별한 해석이나 설명을 달 필요 없이 그 노래가 아직까지도 나에겐 큰 모멘트로 남아 있다. - 이경준(웹진 '이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