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야, 지나고 나니 보이는 것들이 있단다.
비슷한 동네에서 똑같은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때를 지나 대학에 들어가니, 나와는 다른 무언가를 풍기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새로운 나라에 온 것같은 위화감을 느꼈던 기억이 나. 당시에 엄마는 엄마, 동생과 거실없이 방 세 개인 다세대주택에 월세로 살 때였는데, 혼자서 25평 아파트 전세를 사는 친구도 있었고, 중심가 오피스텔에 우리집 만큼 월세를 내고 사는 친구도 있었어. 차를 끌고 다니는 친구들도 꽤 있었구. 용돈은 또 어찌나 많이씩 받던지...
경제적인 여유로움 외에 또 다르다고 느낀 것은 정치인이나 사업가, 혹은 투자전문가처럼 내가 생각해 본 적 없는 분야에 뜻을 품고 정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는거야. 나는 그저 '대기업 입사'라는 아주 투박한 꿈을 갖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 친구들을 보며 '어떻게 저런 직업을 가질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신기했던 기억이 나.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건,
그 친구들이 자라면서 보고 들은 세상이 나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지.
엄마 나이 스물 여섯, 각고의 노력끝에 회사에 입사를 하며 들었던 가장 큰 생각은 이거였어.
"드디어 같은 출발선에 섰다."
누구와 같은 출발선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강 내가 생각하기에 '평범'한 사람들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생각을 했어. 나에게 그 '평범함'의 기준은 뭐였을까? 경제력이었지. 먹고 사는 데 크게 돈 걱정없이, 돈 때문에 불행할 일이 없어야 평범한 거라고 생각했어. 나도 이제 먹고 살기 부족하지 않은 평범한 축에 들어왔으니,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그 무언가를 향한 출발선에 동등하게 섰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입사한지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일이 터졌어. 팀장님이 술자리에서 낙하산으로 들어와 말썽만 피우고 있는 임원의 아들을 두고 "야, 너네! 얘네 아빠가 누군지 알아? 얘는 보고 자란게 너희랑 달라 ~ 피가 다르다 이말이야."라고 말한거야. 그 순간 나는 겨우 올라온 절벽의 땅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심정을 느꼈어. 왜였을까? 내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내가 바꿀 수는 없는 '태생'이라는 것이 있다는, 그와 나의 출발선은 결코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충격때문이었을거야.
이제와서 드는 생각은 그 팀장의 말에 내포된 천박한 계급주의는 그릇된 것이지만, 팀장으로서 부적절한 언행이었지만 '말 자체는 맞는 말이었다'라는 거야.
계층: 재산, 지위, 신분 등 객관적 조건이 동일한 사람들의 집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모의 재산,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신분. 평등이라는 이상을 이야기 하다보니 계층이나 신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게 터부시 되지만, 엄마는 우리 사회가 실질적으로 계층사회이며 신분제 사회라고 생각해. 그것이 옳든 그르든 말이야. 신분이나 계층에 따른 귀천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사회의 합의는 분명하지만, 그 신분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것들의 범위는 달라질 수 밖에 없어. 재산이 많을 수록 지위가 높을 수록 어려서부터 경험의 범위가 커진다는 것. 남들보다 쉬이 기회를 얻기도 한다는 것. 수준 높은 문화나 생활양식을 경험하고 더 좋은 교육을 받는다는 것.
누구나 꿀 수 있는 것 같은 꿈도 그래. 앞서 대학생 때 나와는 조금 다른 꿈을 꾸던 친구들 말이야. 어렸을 때야 누구나 대통령도 꿈꾸고, 의사도 꿈꾸고 할 수 있지. 그렇지만 자라면서 그 꿈이 구체화 되느냐 아니면 그저 어렸을 적 귀여운 몽상으로 남느냐의 차이는 아이자체의 역량이 중요하겠지만 그 꿈에 대한 현실적인 가능성이나 로드맵을 어느정도 제시해 줄 수 있는 부모의 역할이 뒷받침 되어야만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그런 태생적인 한계. 엄마의 부모님도 알고 있었겠지만 그것이 죄스럽게 느껴져서 혹은 아이가 알기엔 잔인하다고 생각해서 나에게 제대로 이야기 해주지 않았던 걸까? 왜 어른들은, 미디어는 나에게 늘 노력하면 뭐든지 될 수 있다는 아름다운 '희망'만 이야기 해주었을까? 불쾌한 '현실'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말이야.
그래서 네가 사회로 나가기 전 이 현실에 대해서 꼭 이야기 해주고 싶었어.
좌절하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야. 그냥 네가 살아갈 사회에 대해 알려주는 거야. 순진하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생각하고 휘적휘적 걷다가 크게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말이야. 엄마는 사회는 고난을 이겨내고 노력해서 꿈을 이룬 사람을 더 아름답게 여길거라 생각했어. 낙하산으로 직업을 세습하는 것을 죄악시 여기고 부끄러이 여길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사회가 꼭 그렇게 바르게 돌아가지만은 않더라.
대학생 때 인턴을 지원하는데 지원서의 성장배경란에 부모님의 이혼 이야기를 썼던 기억이 나. 세 모녀가 어렵게 살던 가운데에 내가 어떤 노력을 해서 어떤 결과를 냈는지, 그 과정에서 내가 먹었던 마음가짐 같은 것이나 내면의 힘 같은 것을 썼었지. 그렇게 몇 개의 지원을 광탈 당하고 학교 취업지원센터의 과장님께 상담을 받는데, 과장님이 그러시더구나. "토리씨가 앞으로 꼭 기억해야 할 게 기업에서는 이런 이야기 쓰면 안 좋아해요. 물론 그 노력이 대단한 건 알겠는데, 기업에서는 어렵게 자란 사람들을 좋게보진 않거든. 아무래도 공금횡령이나 그런 위험이 있다고 보기도 하고."
그게 진짜 세상이더라.
누가 더 귀중하고 귀중하지 않고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란다.
더 나은 행복한 삶을 추구할 권리가 누구에겐 있고 없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란다.
태생적으로 누구나 귀중하고, 더 나은 행복한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지.
하지만, 부모가 누군지에 따라 태어나며 정해지는 사회에서의 너의 [출발점]이 있어.
넌 몇 백 km 험난한 길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곳에 한 걸음만에 도착하는 이도 있다는 것.
너보다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 이제 날 닮은 너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엄마, 그건 좀 불공평하잖아. 왜 아무도 잘못된 걸 고치려고 하지 않는거야? 엄마는 왜 아무것도 안 해?"
세상엔,
1. 사회운동가들 처럼 그걸 바꾸려는 사람이 있고,
2. 바꾸지 않고 순응하며 계층 사다리를 올라가려는 사람이 있고,
3.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이 있단다.
생각해봤어. 엄마는 기회의 공정성은 지켜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바꾸는 데에 내 것을 쓸만큼의 사명감은 없더라.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불평만 늘어놓는 쓸데없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더라. 그래서 2번의 삶을 살기로 택했어. 불평하지 않고, 그냥 나에게 주어진 출발선에서 최선을 다해 걷기로 말이야.
멋지진 않지만, 살아보니 이게 최선이었다고 얘기하고 싶네. 너의 출발점은 나의 그것보다 앞서있길 바라며...
(표지 이미지 출처: Hyejin Kang /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