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키고 싶어요.

박연준 시인의 새끼 고양이

by 시적

출처

1. 네이버 블로그, 시가 있는 올봄나라, [출처] 새끼 고양이 - 박연준|작성자 이래춘 출처 (https://blog.naver.com/olbom/223133093262)


내가 '새끼 고양이'란 시를 처음 안 것은 2015년이다. 문학적 치료란 수업 때 저 시를 가지고 발표를 했다. 보고 있으면 따뜻하고 우울하지만 뭔가 위로받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리고 시간이 2024년에 시립도서관 전자책으로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를 빌리면서 또다시 우연하게 '새끼 고양이'란 시를 발견하게 되었다.


2024년 3월 최초로 적고, 작년이라 말한 것 보면 2025년에 또 한 번 고치고, 2026년 현재도 다시금 들여다보고 있다. 아무튼 최초 감상문에 나는 박연준 시인의 시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감각적이고 아기자기한 시어 이면에 어떤 무거운 이야기를 잘 써낸다고 생각했다. 느낌이 달려라 아비를 쓴 김애란 작가를 떠올리게 하며, 왠지 모르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킨다. 박연준의 시는 내게 몽글몽글한 노란 계란찜 같은 텍스처를 내게 느껴지게 한다."


내가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란 시집을 빌려 읽은 느낌은 김혜순 시인의 시집을 보았을 때와 유사하다. 한 시인의 모든 시인을 좋아하게 된 게 아니란 것을 말이다. 한 시를 통해 그 시인의 전체를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일단 그때는 시인의 배경을 몰랐고 지금은 신형철 평론가 덕에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제목에서도 보이듯이 '아버지'와 '나' 사이의 어떤 큰 괴리감이 있는 것이 보인다. 시집 뒷부분에 나온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박연준 시인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증과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시인은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던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던지 할 것 같았다."라고 고백하는 인터뷰가 있었다고 한다. 되게 혼란스러운 상황을 시집에서 '빨강' '파랑' '보라' 같은 강렬한 색채로 박연준 시인은 표현했다. '빨강'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 '파랑'은 피가 빠져나간 자리 혹은 죽음이며, 보라'는 빨강과 파랑이 섞여 사랑과 죽음이 한데 뒤섞인 혼돈일 것 같다.


이런 인식이 생기고, 다시 '새끼 고양이'를 읽었을 때 느낌이 달랐다.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화자의 억눌리고 절제된 감정이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처음 읽을 적에는 '담벼락에 있는 고양이가 울며 지나간 저 사람의 마음을 공감한다'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파란 바탕' 자체가 화자라는 생각이 든다.


'들키고 싶었어요

지붕 위에 오래 앉아

지난밤 꿈이 탈색되는 걸 바라보았죠

눈이 가늘어지고, 수염이 팽팽히 서고

점프해서 멀리

날아가는 상상도 못한 채

마음을 둥글게 말고 앉아 있었죠

들키고 싶어서'


다시 봐도 '들키고 싶었어요'란 첫 문장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낯가림이 많은 나의 기분이 1연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점프해서 멀리/ 날아가는 상상도 못한 채/ 마음을 둥글게 말고 앉아 있었죠' 달아나고 싶었지만 달아나지 못한 화자의 마음이 잘 보이는 것 깉다.


그리고 시 제목이 '새끼 고양이'란 것처럼 시에서 고양이를 연상할 수 있는 표현들이 잘 보여서 좋았다. '눈이 가늘어지고, 수염이 팽팽히 서고/ 점프해서 멀리'란 것이 말이다. 구글에 고양이가 저런 상태일 때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거나 불편해할 때라고 한다. 그리고 고양이들이 높은 곳을 선호해서 지붕에 있는 사진들이 구글에 엄청 많더라.


저런 일상적인 순간을 '지난밤 꿈이 탈색되는 걸 바라보았죠'라고 시적인 순간으로 시인은 전환시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꿈'이 '탈색'되는 것을 '바라보았죠' 같다. 원래 꿈이란 여러 가지 색들이 다양하게 있고 가능성의 연속일 것이다. 그런 꿈이 색깔이 빠지고 빛바랬다는 것은 부정적인 상황일 것이다.


처음 '지난밤 꿈이 탈색되는 걸 바라보았죠'는 내게 너무 난해했다. 그런데 지금은 알 것 같다. 과거에 하얗게 불태웠던 시간들이 아닐까 싶다. 화자는 지금 번아웃이 온 것 같다. 과거에 부푼 꿈을 안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빛에 바래서 제 색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시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평화롭다는 게 참 좋다.


'전깃줄을 타고 건너다니는 봄,

비밀은 너무 가볍거나 무겁죠

몇 번 웃어버리고 나면 얇아져요'


과거의 나는 2연을 보면서 유쾌하고 발랄하다고 느꼈다. 지금은 유쾌한 척 자조적인 어투로 말하는 것 같다. 봄이란 것은 생명이 만연한 것이 전깃줄을 타고 건너다닌다니 갑자기 분위기가 위험해졌다. 실제로 뉴스에 전깃줄 위 고양이가 있다. 아슬아슬한 상황 그게 지금 화자가 처해있는 상황이다. 뒤에 나온 '비밀은 너무 가볍거나 무겁죠/ 몇 번 웃어버리고 나면 얇아져요'에서도 잘 보인다. 사람들은 화자의 비밀을 너무 가볍게 혹은 무겁게 소비하고 있다. 몇 번 웃어버리고 나면 얇아진다는 말에는 허무함이 깊게 배어든 것 같다.


'머리를 누르는 건 모자가 아니죠

견고한 빛의 무게,

태양이 떨어뜨린 살비듬'


저기서 머리를 누른다는 것은 화자가 두통을 느끼고 있는 상황 같다. 그리고 그 두통은 모자라는 실체를 갖고 있지 않고 '견고한 빛의 무게'나 '태양이 떨어뜨린 살비듬'처럼 형체가 없다. 보통 사람이 모자를 쓰는 상황은 뜨거운 태양 빛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런 상황에서 모자가 머리를 조여 두통이 생길 수는 있지만 그것이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답게 표현했지만 실상은 빛의 무게이며 태양이 떨어뜨린 살비듬이다. 아주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여기서 든 생각은 소문의 주동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과거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 실제로 쓴 것은 모자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 봐도 모자일 것이 분명하지만 사실 그것은 견고한 빛의 무게와 태양이 떨어뜨린 살비듬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모자 이면에 존재하는 어떤 진실을 나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그 속에 존재하는 어떤 이야기가 있음을 말이다."


화자가 쓴 것이 모자가 아니라 '견고한 빛의 무게'이며 '태양이 떨어뜨린 살비듬'이라고. 결국 화자를 압박하고 있는 것들이 그들이라고 정체를 밝히는 중이란 점은 과거나 현재나 같아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도 느꼈던 것인데 '새끼 고양이'란 시는 부정적인 것인지 긍정적인 것인지 모호하게 잘 표현한 것 같다. 4연의 시작도 그러하다.


'매일이 환한 낮잠 같아요

가끔 담벼락을 손으로 짚고

울며 가는 사람을 볼 때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죠'


'매일이 환한 낮잠 같아요'는 긍정적일 수도 있는데 부정적일 수도 있는 것 같다. 낮에 잠깐 드는 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런데 '매일이 환한'이란 수식어가 붙으니까 태양이 24시간 지지 않는 백야라는 생각이 든다. 잠을 자야 하는데 불면의 상황 같기도 하고. 위에 나온 '지난밤 꿈이 탈색되는 걸 바라보았죠'와 유사한 표현 같다.


'가끔 담벼락을 손으로 짚고/ 울며 가는 사람을 볼 때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죠'에서는 화자가 직접적으로 개입한다는 게 새롭게 느껴졌다. 1연을 보면 '날아가는 상상도 못한 채/ 마음을 둥글게 말고 안아 있었죠'라고 하는데 말이다. 아마 혼자 담벼락을 손으로 짚어 가며 울어야 하는 사람을 보며 화자는 꼭 자신 같아서 한마디를 얹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계획적으로 말을 건 것이 아니라 충동적으로 뱉어낸 속마음일 것이다.


'이봐요, 이번 생의 그림에선

파란 바탕이 나예요

당신이 울고 지나간.'


"'울고 지나간'이란 말이 '먹다 남겨진 음식'처럼 느껴지고, 울고 있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 흘려버린 자국으로 비유되어 되게 슬프게 느껴졌다."


과거나 지금이나 내가 느낀 것이 동일하다는 게 신기하다. 그리고 맨 처음 느꼈던 그 '위로'도 맞는 것 같다. 누군가의 부속물이 아니라 '파란 바탕'이 되어 '당신이 울고 지나간' 그 길을 '새끼 고양이'인 화자가 지켜봐 준 듯하다.


또 생각해 보면 당신이 울었기 때문에 파란 바탕이 만들어진 것도 같다. 아니면 당신이 울고 지나가기 이전에 이미 화자의 파란 바탕은 크게 형성되어 있었을까. 당신의 불행보다 내 불행이 더 넓다는 듯이 들리기도 하면서, 또 당신과 나는 같은 그림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같고. 아님 당신이 혼자라고 믿던 순간에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확실히 '새끼 고양이'란 시는 마지막 부분이 백미다.


사실 지금은 마지막 연이 '자신을 알아달라는 독백조'일까, 아니면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는 고백'일까 조금은 헷갈린다. 그래도 화자의 그 작고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그 고백 덕분에 난 위안을 얻었다. 혼자가 아니었다는 작은 위안. 누군가도 나처럼 들키고 싶어 어딘가에 마음을 둥글게 말고 있다는 사실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나를 위로해 줬다.


'새끼 고양이'란 시를 읽으면서 내 이야기도 많이 떠올렸다. 카페에 친구들과 놀러 가면 나는 종종 말이 없어지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 나를 들키지 싫어하면서도 한편으로 들키고 싶어 했다. 혼자만의 비밀을 품은 것처럼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것처럼 '새끼 고양이'의 화자도 불안 속에서 '팽창'과 '수축'을 오가는 이중적인 마음이 표현된 게 아닐까 싶다. 둥글게 몸을 마는 것은 수축이고, 파란 바탕이란 것은 내게 팽창의 이미지로 읽힌다.


이렇게 쭉 다시 보니까 내가 왜 '새끼 고양이'에 애착을 가졌는지 알 것 같다. 이 시는 자기 독백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 연이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과 닮아 있다고 말하는 듯하여 내적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약하고 흔들리는 존재이지만 자신의 흔들리는 모습을 파란 바탕이라며 적나라하게 고백하는 느낌이 들어 더 좋아하게 되었다. 이렇게 글로 적어 놓으니까, 오래 전의 내 기억과 현재 기억도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그리고 어디 가서 "박연준 시인을 좋아해."라고 말하지 않고 "박연준 시인 이름을 알아."라고 해야겠다. 좋아한다는 말이 가지는 무게감이 꽤 무겁구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언제 낙서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길 담벼락에 앉아 있을 '새끼 고양이'를 닮은 것 같아서 이 낙서를 골라 보았다.


미래의 나에게 한마디 남겨 놓자면, 수정을 편하게 하고 싶으면 '발행 취소'를 누르고 수정하고 저장해라. 발행한 채로 수정하니까 '저장'이 없고 바로 '발행'이다.


또 말하자면 봤던 것 또 보니까 읽는 속도가 하이패스다. 속이 다 시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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