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옥 시인의 울음 상자
출처
1, 다음 카페, 푸른 시의 방, 울음 상자/ 박재옥, 강인한 (https://cafe.daum.net/poemory/JW6F/14104)
2. 네이버 블로그, 키튼쿨, 매미 우는 시기 이유 수명 먹이는? (https://blog.naver.com/khy920630/223950858132?isInf=true&trackingCode=nx)
3. 위키백과, 슈뢰딩거의 고양이 (https://ko.wikipedia.org/wiki/%EC%8A%88%EB%A2%B0%EB%94%A9%EA%B1%B0%EC%9D%98_%EA%B3%A0%EC%96%91%EC%9D%B4)
여름은 덥고 습해서 짜증 나는 계절이다. 하지만 드라마 <그해 우리는>이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처럼 생명이 가득한 이미지나 혹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여름이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이중적인 면모를 지닌 '여름'을 키워드로 잡고서 다음 카페 <푸른 시의 방>에서 검색을 했다. 9월이 되었다고 30도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뭔가 그래도 느낌이 달라서 문득 골랐다. 은근 시에 '여름'이란 키워드는 들어가나 내가 생각했던 주제나 이야기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이것저것 클릭한 것 중 '울음 상자'를 고른 것은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서 그랬다. 최근 영화감독 팀 버튼이 인터뷰한 영상에서 자신이 만든 영화 캐릭터에 공감했기에 그렇게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런 것처럼 나도 유독 '눈물' 혹은 '울음' 이런 키워드에 공감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박재옥이란 이름을 오늘 처음 봤고, 네이버에 검색하니까 의사 외 다양한 직종이 나와 박재옥 시인으로 검색해야 했다. 박재옥 시인 사진을 보니까 머리는 짧고 앞머리가 있고 얼굴이 수수하신 분이다. 얼핏 보면 노희경 작가님처럼 성별이 헷갈릴 것 같다. 힘알탱이가 없는 축 처진 눈꼬리가 마치 내가 초등학생 때 엄격했던 남자 할아버지 선생님이 떠오른다. 힘이 없는 것도 같으면서 엄근진한 이미지가 동시에 보여서 뭔가 중독성 있는 사진 같다. 다시 봐도 힘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진 같다.
내게 '울음 상자'에 대한 이미지는 완전히 마음에 들어는 아니지만 잔잔하게 이어나가는 이야기가 툭 하고 큰 울림을 줬다. 수수한 안개꽃이 일관성 있게 한 줄로 쭉 나열된 그런 느낌이다. 시의 제목 '울음 상자'라는 것을 보자마자 '상자'라는 단어에 꽂혀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떠오른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상자 안에 고양이가 있다. 어떤 장치로 인해 이 상자 안의 고양이는 1시간 내로 50퍼센트 확률로 죽거나 산다. 그러나 그 상자를 열어볼 수는 없다. 위키백과에 양자역학이니 혹은 죽음과 삶 어느 중간이라는 말이 읽힌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기 위해 만든 가정법인가. 상자 안에 울음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울음일까 죽어가는 울음일까.
1연을 보았다. '긴 둑의 벚나무 터널/ 한여름 매미 상자를 열자, 울음이 수해 난 듯 쏟아져 나온다' 4월 매미를 구글에 검색하니까 오마이뉴스에서 매미의 갈래가 달라서 4월에도 11월에도 매미의 울음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둑은 물이 범람하지 못하게 쌓은 흙이나 콘크리트 구조물이라고 한다. 뒤에 한여름 매미 상자를 열자, '울음이 수해 난 듯' 쏟아져 나온다가 앞에 나온 '긴 둑'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한여름 매미 상자'를 누가 열었을까. 열면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기분이 든다. 전체적으로 시작부터 근사하다는 인상을 준다. 봄철 매미 울음이 들린다는 것을 저렇게 아름답게 표현해 주었으니.
2연은 감탄만 나온다. '귀의 둑이 터진 듯'이라니.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귀가 아픈 것을 저렇게 우아하게 또 임팩트 있게 표현했음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귀 찢어지게 아픈 그 심정을 귀의 둑이 터진 듯하다는 게 역시 시인의 표현은 달라도 다른가보다 싶다.
3연 '그 많은 울음이 나온 상자의 크기를 믿을 수 없다'에서 절로 매미의 크기가 떠오른다. 손가락 3개 합쳐 놓은 크기 같은 매미가 울음은 귀청 떨어져 나가라 운다는 게 다른 사람도 믿기 어려울 것이다. '꺼내도 꺼내도 멈추지 않는 울음의 치사량' 마치 매미의 울음이 독인 것처럼 '치사량'이란 표현을 썼으며, '꺼내도 꺼내도 멈추지 않는' 화수분 같은 많은 양을 자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연 1행에서는 '상자의 크기를 믿을 수 없다'라고 하고 3연 3행에서는 '울음의 크기 또한 믿을 수 없다'라고 하며 뫼비우스 띠처럼 계속 돌고 도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저렇게 '작은 상자'에서 많은 울음이 나왔다니, 저렇게 작은 상자에서 이처럼 '큰 울음'이 나왔다니. 결론을 '상자 크기에 비해서 울음이 지나치게 큰 탓'으로 내린다. 이런 걸 좋게 말하면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할까 싶다. 하지만 지금은 작은 우연에서 말도 안 되는 큰 악재를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 같다.
4연을 '내 안의 상자에는 어떤 울음이 들어있을지 궁금해진다/ 한 번도 속 시원하게 열어보지 못한 울음 상자인데/ 상자 크기에 비해서 지나치게 작은 울음은 아닐지' 화자의 시선이 매미에서 자신으로 옮겨졌다. 매미를 보면서 자신 안에 담겨 있는 커다란 울음에 대해 화자는 궁금증을 느낀다. '한 번도 속 시원하게 열어보지 못한 울음 상자'라면서 '상자 크기에 비해서 지나치게 작은 울음은 아닐지'라고 걱정한다. 여기서 화자 자신의 크기에 비해 작은 울음이란 자신의 슬픔을 사소한 일이거나 보잘것없는 일이라면 어쩔지 화자는 걱정하는 것 같다. 보면 화자는 이 정도 일은 남들도 다 겪는 일이라며 자신의 슬픔을 차곡차곡 묻어두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5연에서 '귀의 문을 열고 자세히 들어보면'이 나온다. 앞에 2연이 절로 떠오르는 크기이며 똑같이 귀라는 말이 등장한다. 여기서 '귀의 문을 열고 자세히 들어보면'은 화자가 마음을 열고 상대의 슬픔 혹은 울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대상은 화자 자신이 되기도 하며 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매미도 해당될 것 같다. 그리고 울음은 발산의 성질을 갖고 있고, 귀는 수용의 성질을 갖고 있다. 이런 상반된 성질이 이 시에 잘 녹아져 있어서 너무 좋았다.
6연에서는 '울음'이란 무엇인지 화자가 생생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울음이 터질 때마다 생명의 현이 있는 대로 떤다'에서는 너무 감정이 북받쳐서 떨리는 성대가 떠오른다. '살아있는 것들이 울 줄도 아는 것이다'는 아주 아름답다. 저 말대로 죽은 것은 울음소리를 낼 수 없다. '울음과 울음 사이에 걸려있는 생(生)의 외줄'은 살기 위해서 우리는 울음이라는 외줄 타기를 한 번씩 겪는 것이라고 화자는 말해주는 것 같다. '살아있는 것들이 울 줄도 아는 것이다' 직관적이지만 아름답다. 생이니 생명이니 무겁고 또 올드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오밀조밀 잘 꾸며진 시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7연 1행 '햇양파처럼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라니. 햇양파가 얼마나 신선하고 아삭한가. 그래서 신선한 바람이란 가을이 곧 다가옴을 알리고 있다. 그에 이어서 2행 '여름이 난파선처럼 급격하게 기울자, 나무에/ 매달려 있던 매미들이 낙과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 역시 너무 멋지다. 여름이 저무는 것을 '여름이 난파선처럼 급격하게 기울자'라고 하는 것이. 난파선이란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나 부서지거나 기울어진 배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매미들이 낙과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처럼 매미들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
8연 '울음을 비운 상자는 탄피처럼 조용하다'에서 매미가 죽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양이 떠오른다. 탄피는 총알의 껍데기로, 이미 한여름에 매미의 울음이 발사되었음을 총을 쏘았다는 것으로 둘을 잘 엮어냈다. '그 많던 울음이 사막의 물처럼 삽시간에 다 어디로/ 스며들었는지 궁금할 지경으로'란 말에서 1연에 나온 '울음의 수해'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신기함을 화자는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많던 울음이 사라지고 '사막'이 된 것처럼 적막한 이 시간에 대해 화자는 궁금해하고 있다.
9연 '모든 죽음은 겸손하다'라고 되어 있다. 죽어서 가져갈 수 있는 부귀영화란 없다. 오로지 자신 하나만 가져갈 수 있기에 죽음 앞에 겸손이란 말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생의 허물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뒹굴어도 좋을 만큼'에서 '생의 허물'은 매미의 죽음이고, '아무렇게나 바닥에 뒹굴어도 좋을 만큼'에서 체면 의식 같은 것은 다 모두 던져버린 것이 '죽음'이라고 화자는 매미의 죽음을 통해 깨달은 것 같다.
10연 '숲의 시간은 떠난 자들을 위해서 흐른다/ 울음의 순교자들이 부활하여 다시 돌아올 날 기다리며'라는 말에서 매미가 순교자로 급부상한 것 같다. 순교자란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말한다. 매미는 땅에서 5년 유충의 시간을 보내고, 성충이 되어 나무에서 한 달 바짝 살다가 죽기 때문에 '울음의 순교자'란 말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알고 보면 그들은 5년 전부터 한 달 울기 위해 준비하는 아이돌 연습생 같은 이들일지도 모르겠다.
'숲의 시간은 떠난 자들을 위해서 흐른다'는 어떤 말일까. '떠난 자들' 매미들이 죽고 다시 돌아올 매미를 위해 준비한다는 것일까. 뒤에 보면 '울음의 순교자들이 부활하여 다시 돌아올 날 기다리며'라는데 멋지고 웅장한데 '내년에 매미가 죽지도 않고 또다시 돌아왔다'라면 끔찍한 공포 엔딩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울음 상자'라는 시를 다 읽고 나니까 '매미'를 위한 헌정시라는 생각도 든다. 이미 '울음 상자'라는 말 자체가 '매미'를 지칭하는 말일 테니까. 보면 2연에 '귀의 둑이 터진 듯'이나 3연의 '울음의 치사량'에서는 화자와 매미의 울음 사이에서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데 4연 '내 안의 상자에는 어떤 울음이 들어있을지 궁금해진다'에서 타인의 울음에서 자신의 울음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러면서 화자는 매미의 울음에 귀를 열게 되었고, 그 또한 '생명의 현이 있는 대로 떤다'는 것임을 화자는 깨닫게 되었다. 나라면 성능 좋은 귀마개를 미리 준비하려고 할 텐데, 매미의 세레나데를 잘 빗겨나가기 위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길거리나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아이처럼 통곡을 하고 있다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저 사람에게 말 못 할 어떤 슬픈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안 들리는 척 못 본 척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능동적인 사람이라면 휴지를 건네거나 위로의 말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매미가 매해 여름마다 울지만 그 울음에는 매미만의 또 다른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화자는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귀의 둑이 터질 것 같지만.
그런 의미에서 '울음 상자'라는 시는 내게 생에 대한 연민과 이해심이 가득한 시 같았다.
내가 어디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떠올렸나 보면 4연이다. '내 안의 상자에는 어떤 울음이 들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한 번도 속 시원하게 열어보지 못한 울음상자인데/ 상자 크기에 비해서 지나치게 작은 울음은 아닐지'라는 말에서 열지 않은 상자와 슈뢰딩거 고양이를 떠올린 모양이다. 보면 화자는 끝끝내 자신의 울음을 열어 보았는지 안 열어보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울음이란 것에서 귀를 열고 들어볼 줄 알게 되었음을 5연을 통해 알 수 있고, 6연을 통해 울음이란 생의 떨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화자는 매미를 통해서 자신의 삶 내지는 삶과 울음에 대해 고찰하게 된 것 같다. 그런 깨달음을 줬기 때문에 더더욱 '울음의 순교자'란 자리에 매미가 잘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낙서는 울음이란 직선적이지 않고 저렇게 이리저리 날뛸 것 같아서 골랐다. 전에 이 글의 제목을 정하게 많이 난감했다고 이 글에 적어놨는데. 지금 제목 참 마음에 든다. '부서지는 여름'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여름' '허물에서 다시 돌아온 여름' 매미가 한 사람에게 이 정도의 영향을 끼칠 수 있음에 놀라움을 느꼈다. 다시 읽어도 좋은 시는 좋은 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