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시인의 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
출처
1.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 지성사, 2008, 120-121p
2. 채널 A,[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71> 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 (https://ichannela.com/news/detail/64306399-3.do)
3. <시마을>,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 심보선, (http://www.feelpoem.com/bbs/board.php?bo_table=m11&wr_id=3111)
심보선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그때는 형형색색의 비유가 마음에 들었다. '전날 벗어놓은 바지' '태양을 노려보는 사각형' 고대 종교처럼 그녀가' '누추하게 구겨진 생' 이런 변화무쌍한 비유를 좋아했다. 지금은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비극을 떠올리면 정말 비극이 눈앞에 펼쳐졌다'라는 말이 와닿는다. 무한도전 프로그램에서 유재석과 이적이 부른 <말하는 대로>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생은 거짓말 투성이였는데/(중략)/그때 하늘을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라는 이야기가 와닿는다. 모든 게 거짓말 같고 암울할 때 너와 나의 찰나의 사랑만큼은 진실했음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줬다. 그때 좋아하는 이유와 지금 좋아하는 이유가 다르지만 나는 좋아한다는 이유로 심보선 시인의 시집을 냉큼 사버렸고, 그게 <슬픔이 없는 십오 초>였다.
내가 '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를 고른 것은 우연이다. 오랜만에 시집을 들추면서 흐린 눈으로 읽어도 뭔가 내게 반짝임을 줬기 때문에 책갈피를 해놓고 몇 주 묵혀뒀다. 그래서 대충 본 탓에 은행이 금융기관이라고 이해하지 못하고 어렴풋이 은행나무 열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은행은 전자의 은행이었다.
'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
이 시를 처음 읽으면 느껴지는 특징이 모든 행이 '~네'로 끝난다는 점이다. 분명 화자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겁게 전개되기 보다 가볍게 툭툭 내던지듯한 말투다. '어느 날'이라는 점에서 시점도 특정할 수 없고 애매모호하며 단순하다. 다음 행을 읽어보면 화자가 애인의 손을 잡고 은행에 간 정황을 알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유리문의 날개가 펄럭거리네/ 은행은 날아가지 않고 정주하고 있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바로 떠오른 생각은 서글픔이었다. 화자와 애인의 상황은 위태롭게 펄럭거리는데 반해 은행은 한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이 '돈'이라는 게 펄럭거리고 가벼운데 반해, 은행에서 드는 '청약' 혹은 '저축'은 안정적이다는 인식이 있다. 불안정한 현실과 안정적인 현실을 꿈꾸는 청춘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자연스럽게 내게 슬프게 와닿았던 모양이다.
'꿈은 모양이 다양하다네'
이 말은 은행에 적금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말로 해석되었다. 애인과 화자는 앞으로의 미래를 설계할 생각에 은행에서 흐뭇한 마음을 갖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긍정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낄낄대며 담배를 나눠 갖네'
'꿈은 모양이 다양하다'고 말하고 바로 다음 연이 '우리는 낄낄대며 담배를 나눠 갖네'라고 한다. 갑자기 '꿈' 이야기를 하다가 '담배'라는 이야기로 전환되었다. 마냥 희망적일 것 같던 미래가 불확실하고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 화자와 애인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그리고 둘은 마치 콩 한쪽도 나눠먹는 것처럼 담배를 나눠 갖네라고 하며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은행의 예절은 금연 하나뿐이라네'
앞에서는 화자와 애인이 담배를 나눠 갖었는데, 은행의 예절은 금연 하나분이라는 사실이 되게 처참하게 들린다. 마치 이 연인들에게 남은 자산은 담배 뿐인데 그것을 외면 받은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
'유리문의 날개에는 깃털이 없다네'
유리문의 날개라는 것은 유리문이 퍼덕이는 것을 보고 화자가 날개라고 의미부여한 것이지 사실은 유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깃털이 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일지 모르지만, 이 또한 냉정한 현실로 느껴졌다. 그리고 유리라는 차가운 성질과 깃털이라는 따뜻한 성질이 교묘하게 엉켜있는 점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문장이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미래에 속한다고/ 미래 속에서 어른이 되었다고/ 애인이 나에게 가르쳐주네'
나는 화자도 애인과 같은 성인일 것인데 애인에게 '어른이 되었다'고 가르침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비애를 느꼈다. 순수와 무지 사이를 저 3행으로 완연하게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부터 미래에 속한다'는 이유로 '미래 속에서 어른이 되었다'라는 점이 인상 깊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선택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이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스무 살만 넘기면 통과의례 없이 어른이 되는 현실을 잘 반영한 문장이란 생각이 든다.
'금방 머리 위로 파산한 새가 날아갔네/ 후드드득/ 깃털 같은 빗방울들이 떨어지네'
화자와 애인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중에 비가 떨어지는 상황에 마주하게 되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불운한 상황인 것 같다. 그리고 '머리 위로 파산한 새가 날아갔네'라는 것은 화자와 애인이 직면한 상황이 '파산'인 것을 넌지시 알려주는 것처럼 들렸다.
'어느 날 우리는 많은 돈을 갖겠네'
이런 불운한 상황에서도 화자와 애인은 작은 소망을 갖는다. 언제가 될지 모르니까 '어느 날'이란 말을 빌려서 미래에 우리는 많은 돈을 갖겠다고 말이다. 나는 이 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들리지 않는다. 지금이 너무 밑바닥이라 언젠가는 나아지겠지라고 하는 아주 얄팍한 희망 같았다. 마치 추석 보름달에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비는 일 같은 말이다.
나는 이 시를 다 읽고 내가 처음 좋아했던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와 '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라는 시가 닮아있다고 느껴졌다. 하나의 연으로 되어있다는 점, 슬픈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달한다는 점,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끼워져있다는 것이 말이다.
앞으로 종종 아는 시를 다시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기억에서 꺼진 시도 다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