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인의 그리운 날씨
출처
1. 다음 카페, 푸른 시의 방, 김혜순의 그리운 날씨 감상/문태준 (https://m.cafe.daum.net/poemory/H5qF/7171)
<언니네 이발관>이란 밴드의 노래 중 "순간을 믿어요"란 곡이 있다. 가삿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우리 기억 속에 남은 순간을 믿어요.'
시간이 지나도 안 잊히는 노래가 있다. 많은 시간을 지나왔어도 어제처럼 선명하게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 김혜순 시인의 그리운 날씨란 시는 그런 순간을 표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날씨이지만 그때가 그립다고 하는 것이 인상적이며 궁금증을 자아냈다.
첫 시작은 단조롭고 매끄럽다는 인상을 주었다.
'날씨와 나, 둘만 있어/ 다정했다 매서웠다 날씨의 기분'
먼저 날씨가 사람으로 의인화되어 있는데, 희로애락을 잘 느끼는 감수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그런 캐릭터와 날씨라는 이름이 잘 매칭된다는 생각도 했다. 최근 유튜브 채널 <형수다>에서 형사들이 모여 라이어 게임을 하는데 거기서 제시어가 '아내'였다. 그리고 한 형사님이 '아내'를 "날씨처럼 변화무쌍한 것"이라 말한 것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2연에서 읽어보면 화자에게 날씨란 굉장히 중요한 존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중략) 날씨에 따라 당연히 옷을 갈아입고/ 춤춰줄까 물구나무서줄까 물어봐'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밤하늘의 별도 따줄게"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그만큼 내게 스위트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우리가 날씨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변화무쌍한 날씨에게 전적으로 맞춰주는 화자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게 너무 좋았다.
3연까지 읽으면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구나 싶다. 화를 내다가 슬퍼서 우는 날씨의 변덕마저도 화자는 사랑한다고 말한다. 4연에서도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면 손뼉을 치며 그 상황을 기꺼이 함께할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5연에서는 절정이다. 화자는 날씨를 혼자 두는 게 미안해서 늘 불면이라고 한다. 이런 시 구절을 읽고 있으니까 내가 시를 읽는지, 로맨스 드라마 속 달달한 고백을 엿듣는 것인지 참 헷갈렸다. 그만큼 좋았다.
6연에서는 문득 이런 말을 한다.
'날씨와 나 늘 둘이지만/ 아침이면 말하곤 해'
난 이 구절은 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날씨와 화자가 둘이 있다는 사실과 아침에 말을 하고는 한다는 것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말이다. 지금 문득 드는 생각은 화자와 날씨가 늘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침이면 의례적으로 대화의 문을 연다는 생각이 든다.
7연에서도 화자가 날씨에게 '내가 너를 열어줄게'라고 말한다. 도대체 '멀고먼 곳으로 열어줄게'란 무엇을 의미할까, 하다가 문득 자유를 떠올렸다. 화자에게 사랑이란 상대에게 자유와 존중이 뒷받침되는 사랑인 것 같다.
그리고 8연에서는 그런 화자의 사랑에 대한 날씨의 반응 같았다.
'(중략) 엄마 사라진 뒤의 나처럼/ 밝았다 잠들었다 바람 불었다 깨어났다'
어쩌면 날씨에게 사랑은 엄마의 사랑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구속해 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0연에서 화자가 사라진 것을 엄마가 사라진 것처럼 날씨가 반응했다는 것을 보면서, 날씨에게도 화자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잘 느끼게 해 주었다.
11연에서는 그런 시련을 벗어나서 연인 사이의 적절한 온도를 찾은 것 같은 장면이 나온다.
'연못에 몸을 담그고 머리칼을 강아지처럼 흔들며/ 내일은 둘 뭐할까?/ 미지근한 구름 속에서의 축축한 키스'
'머리칼을 강아지처럼 흔들며'란 말에서는 장난기 가득한 커플을 보았고, '내일은 둘 뭐할까?'란 말에서는 평범한 일상을 같이 보내는 두 사람을 보았고, '미지근한 구름 속에서의 축축한 키스'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를 유지하는 연인을 떠올렸다. 난 이 구절이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다.
12연에서는 화자의 인간적인 고백이 나온다. 날씨가 화자의 창문을 쾅쾅 치면 헤어지고 싶다고 한다. 그런 마음도 들었지만 13연에서 보면 떠나간 일이 어떻게 펼쳐졌을지는 궁금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내 기준에서 이런 남자 주인공이 있다면 아주 완벽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14연에서는 왜 시의 제목이 '그리운 날씨'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 지나고 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날씨에게/ 하루도 같은 하늘을 준비하지 않은/ 나의 날씨에게'
여기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화자가 날씨를 '하루도 같은 하늘을 준비하지 않은'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변덕'이 되는 것을 누군가에게는 '변화무쌍한 선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며 되게 감동받았다.
15연 보니까 6연이랑 되게 비슷한 것 같다.
'어제 날씨는 없었던 것처럼/ 나는 늘 말해'
날씨가 늘 달라지는 것과 내가 늘 말하는 것에 어떤 연관성이 있나 싶지만, 이건 쉽게 읽혔다. 날씨가 노력하는 만큼 화자도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들린다. 여기서 '말한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임을 느끼게 해 줬다.
16연 너무 달달하다.
'이 세상에는 너와 나 둘이면 충분해'
마지막 연에서 정점을 찍는다.
'다른 건 필요없어'
이 시를 쭉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프러포즈할 때 낭독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시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 시를 다 읽으면 시에서 '둘'이란 숫자를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둘이라서 겪는 여러 가지 희로애락에 대해서 '그리운 날씨'란 시가 잘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문장들이 하나 같이 다 이쁘다. 2연에서 '날씨에 따라 당연히 옷을 갈아입고'에서 '당연히'란 말에 치였다. 4연에서 어려운 날이 와도 '손뼉을 치면서 햇빛과 함께 빗줄기 맞으러 나가주지'라는 호탕한 대답에 설렜다. 10연에서는 '연못에 몸을 담그고 머리칼을 강아지처럼 흔들며'라는 묘사가 좋았고, 11연에서는 날씨가 내는 화를 '화내고 파란 병 깨고 여름 구름'이라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문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란 책을 떠올렸고, 그 느낌을 연서로 표현한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운 날씨'란 시를 읽으면서 되게 즐거웠다. 보통 '그립다'는 과거 혹은 부재의 의미가 담겨있는데, 이 시에서는 40대의 부부가 스무살의 연애를 추억하며 회상하는 의미에서 그립다로 들린다. 이 시만큼 달달한 시는 읽어본 적이 없었다. 정말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