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서 '직원'으로 일한다는 것
2024년 올해로 직장인 6년 차를 맞이했다. 나는 유통 업계 상품기획자이고 회사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MD(Merchan Diser), BM(Brand Manager)과 같은 직무로 불린다. 식품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베이커리, 음료, 원물간식, 다이어트 등 소카테고리들을 맡아 상품을 기획하고 브랜드를 만들었다.
기획자라고 하면 대단히 창의적인 영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상품을 기획하는 일은 한 10% 정도? 그 이후는 시장조사, 매출관리, 거래처관리, 유관부서 소통, 상품 이슈 해결이 주된 업무이다. 한 마디로 회사에 출근하면 반은 회의하고 반은 통화를 하고 그 나머지는 그 업무들을 정리하고 공유하며 내 집중력을 다 쏟고 온다는 말이다.
첫 회사로 스타트업에 들어가 4년 5개월가량 일을 했다. HMR, 이커머스 호황기인 시장의 흐름에 따라 매일 야근하며 치열하게 일을 해도 재미가 있던 시절이었다.(아, 한 3년 반 정도까지는?) 그때 올린 스토리를 보면 밤 11시 이후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일상이 다반사였다. 나는 항상 뒤처진다는 생각을 해서 주말에도 맛집이나 브랜드 전시를 보러 가곤 했다. 베이커리를 담당할 때는 내돈내산으로 제과/제빵 주말 수업을 들으면서 입에 맞지도 않는 빵을 한 아름 들고 올 정도로 열심이었다.
건강에 적신호가 온 건 4년 차 때의 일이다. 모든 업무에 관여를 하는 직무인지라 책임감이 막중했고, 매번 긴장을 해서 신경이 날이 서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회사 내에서 내 브랜드 매출이 잘 나지 않았고 과재고와 상품 이슈들로 자존감이 바닥을 기던 상태였다. 권고사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회사였어서 필요가 없어진다면 내쳐질 사람 1순위가 나였던 것 같다.
심장이 조일 듯이 아파서 잠을 못 자고 병원에 갔더니 식도염. 위내시경에서는 용종을 떼내질 않나, 갑상선 수치는 올라있고 잠은 거의 자질 못했다. 새벽 4시까지 깨있다가 겨우 잠들어도 1시간 단위로 놀라며 일어나는 게 일상이 되고 있었다. 지친 몸으로 집에 오면 "나는 왜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일까"하며 회사에서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 약한 공황장애 증세와 불안증,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회사로 가는 지하철이 너무 숨이 막혀 어지러웠고, 사무실의 답답한 공기가 싫어서 소리 지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지하철역에서 회사로 가는 길마다 매일매일 차에 치여서 회사 가기 싫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행히도 나를 붙들어주는 동료들과 팀장님이 있었지만 그 회사에서는 매출을 낼 수 없는 카테고리를 쥐어줘 놓고 책임전가를 하는 곳이라서 버티기란 쉽지 않았다. 덕분에 카테고리를 바꿔 소위 대박 상품을 출시했지만 그 공은 내 것이 아니었다. 상품을 출시하게 허락해 준 회사의 공이었다. 이커머스 부흥기가 끝나고 몇 번의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내리막은 걷는 회사에서는 모든 게 다시 내 책임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건 우습게도 내 하지정맥 수술이었다. 하지정맥 수술을 하고 계단을 오르내릴 수가 없어서 잠시 본가에 내려와 재택근무를 했는데, 아빠랑 같이 걷는 시골의 조용한 산책길이 너무나 행복했다. 엄마가 해주는 밥이 너무 맛있었다. 커피를 마셔도 잠을 정말 잘 잤다. 봄나물을 캐고 싶다는 친구들을 고모가 키우는 텃밭으로 불러 봄 볕 아래 그녀들의 호미질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지 않나? 평화롭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그 생각을 하자마자 마음이 정말 편해졌다. 내가 무슨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도 아니고(그때 내 연봉을 생각하면 정말 기가 막힌다. 물론 지금 연봉도 기가 막힌다.) 이건 내 사업도 아닌데. 나는 무엇을 위해서 잠도 못 잘 정도로 불편하게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나는 퇴사를 할 수 있다는 옵션이 없는 것처럼. 마치 이 회사에서 내쳐지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자존감이 바닥인 채로 지냈다는 사실이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참... 안쓰럽다.
찬란한 업적으로 본부장까지 올라간 우리 팀장님은 끝끝내 그 책임을 다 지고 퇴사하게 되었다. 안면장애가 이유였다. 물론 회사에서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았고, 그 사람을 탓하기도 했다. 함께 일하던 내 동료는 공황장애가 왔다. 회사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책임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회사에 애정을 가지고 일하던 내 동료들은 결국 권고사직으로 회사에서 나왔다.
회사는 개인을 책임지지 않는다. 번아웃이 온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일해서 얻는 게 결국 정신병이라면 개인이 입는 데미지는 누가 책임지나? 나 자신은 너무 소중하고 내 몸과 마음은 내가 한평생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인데?
10개월간의 갭이어를 가진 이후 두 번의 이직을 했지만, 중견기업도 답은 아니었고 돈이 안정적인 중소기업도 답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고 있다. 결국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면. 내가 행복한 일을 하고 내가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일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는 명예욕, 권력욕, 재물에 대한 욕심이 적은 사람이다. 애초부터 끝이 안 보이는 위를 향해 올라가며 경쟁할 필요가 없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혹시 자신을 잃어가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노력을 꼭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리미트를 알고 일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지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