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고양이의 날을 맞아
우리 집에는 '묘르신'이 산다.
부잣집에서 호강하며 살던 고양이 '미미'는
고양이털알레르기 때문에 더는 같이 살기 어렵다는 전주인을 떠나
우리 집으로 왔다.
두 살 반이던 봄날에 처음 만나 '봄이'로 개명을 하고 12년 넘게 함께 살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일부러 봄이의 나이를 정확히 헤아리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15살, 20살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순둥순둥하고 따스한 성격의 봄이와 함께한 날들은 큰 트러블 없이
매일이 봄날처럼 따뜻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최근 얼마 전부터 봄이의 식성이 까탈스러워졌다.
고양이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성격이 까칠해지고 입맛도 예민해진다더니
전에 없던 밥투정, 물투정이 심하다.
내가 집에 있을 때는 껌딱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시어머니처럼 "냐옹냐옹" 잔소리를 퍼붓는다.
봄이는 특정할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
갑작스레 워터소믈리에급 미각을 획득한 걸까.
어떤 날은 수돗물을 맛있게 먹고,
어느 날은 정수기물을 줘야만 먹는다.
또 다른 날에는 내가 족욕을 하는 동안 나의 발이 담겨있는 물을 한참 동안 흡입했다.
물 주는 방식도 어느 한 가지 방법으로 특정할 수가 없다.
물을 졸졸 흘려줘야 먹는가 하면,
또 다른 날은 두 손으로 물그릇을 만들어 턱밑에 받쳐줘야 먹고,
또 다른 날엔 물이 잘 담겨있는 물그릇을 굳이 발로 툭툭 쳐 바닥에 흘려놓고는
엎질러진 물을 먹기도 한다.
밥은 또 어떠한가.
어떤 사료를 줘도 투정 안 하고 잘 먹던 녀석은
이런 비율로 저런 비율로 건사료와 습식밀 두 가지,
총 세 가지 사료를 잘 배합해서 줘야만 밥을 먹는다.
물 먹이고 밥 먹였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저녁까지 다 먹이고 온갖 수발을 들고 나서 나도 좀 쉴라치면
슬금슬금 다가와 장난을 건다. 뛰어놀고 싶다는 신호다.
종일 혼자 시간 보내는 녀석을 생각하면 내 몸이 피곤해도
같이 뛰어다니며 숨바꼭질 놀이, 낚시놀이도 해줘야 한다.
화장실 청소도 제 손으로 한번 하는 법이 없으니 이 또한 내 차지다.
시집살이도 이런 시집살이가 없다.
쉽지 않은 함께 살이 중에 봄이에게 내가 얻는 것은
사람 어느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는 종류의 위안이다.
사람과 달리 반려동물에게는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니
봄이가 내게 주는 위안은 순도 100%의 위안이다.
가끔씩 나에게도 힐링이 필요한 밤이 오면
난 봄이를 끌어안고 누워 후덕한 그녀의 뱃살을
밀가루 반죽하듯 쭈물쭈물 주무른다.
봄이는 온몸이 힐링덩어리다.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한지 안고만 있어도
온갖 분노와 슬픔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그 말랑한 몸을 끌어안으면 봄이는 체념한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온몸을 내게 내맡긴다.
봄이의 눈을 바라보며 그날 있던 속상한 일들을 하소연하면
신기하게도 봄이는 내 말이 다 끝나도록 눈빛을 마주하고 들어준다.
봄이는 나의 언어를 모르고 나는 봄이의 언어를 모르지만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봄이는 신뢰와 평안이 가득 깃든 눈빛으로
눈꺼풀을 깜빡거려 공감하고, 간간이 야옹거리며 호응도 해준다.
골골~~ 골골~~ 제 심장을 울려
'괜찮아. 모든 일은 다 좋은 일이야.'라고 온몸으로 말해준다.
봄이와 살게 된 후 나는 길 위의 고양이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주인과 산책 나온 강아지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참새를 봐도, 꿀벌을 봐도 봄이가 떠올라 미소 짓게 되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누군가의 생애를 책임지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가볍거나 녹록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곁을 내어주며 함께 살아간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스미고, 서로의 일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