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아무나가 아니면 된다.

by 고모효진

원장님이 출근하기 전부터 나는 먼저 와있곤 했다.


그날도 나는 원장님보다 먼저 와서 복도에 서 있었다.

밖을 내려다보며 기다리는데, 원장님이 나를 발견하고

이름을 크게 부르셨다.


그날따라 원장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일이 금방 끝났다.

인사하고 서둘러 퇴근하는 나를

원장님께서 붙잡으셨다.


"최쌤, 나랑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요?"


그날은 원장님이 학원 상가 계약을 마친 날이었다.


20평 남짓 아파트 공간은 아이들로 미어터졌다.

거실에는 원장님 책상 하나와

아이들이 자습하는 원형 테이블 하나가

나의 책상을 대신했다.


한 타임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거실엔 아이들이

빼곡히 단어책을 들고 서 있거나

방바닥에 주저앉아 다음 수업 시간을 기다렸다.


방은 안방과 작은방 2개뿐이었고

원장님이 안방에서 수업하고 계시면

나는 작은방에서 한두 명 정도 듣기 수업이나

기초가 달리는 아이들의 문법 수업을 맡았다.


하루는 원장님께서 나를 작은방으로 부르셨다.


"동은이 문법 수업도 이제 최쌤에게 맡길까 하는데 괜찮아요?"


동은이는 나와 1:1로 듣기 수업을 하던 중1 여학생이었다.


남자 원장님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문법 수업마저

여자보조쌤과 하고 싶다는 것이 이유라며

원장님께서 조심스레 말을 전했다.


늘 표정이 굳어있던 동은이가 내 수업시간에는 배시시 웃곤 했다.

동은이는 내가 이어 맡게 된 문법 수업도 곧잘 따라왔다.


그러자 원장님은 2학년, 3학년 문법 수업도 가끔씩 맡기셨다.


그 좁은 공간에 아이들은 점점 늘어났고

그 인원을 수용할 학원이 필요한 시점에

원장님의 제안은 단비 같았다.




그렇게 나는 취업증명서를 받아들었다.

건네받은 종이 한 장은, 생각보다 얇았다.


아이들과 둘러앉아 수업 준비하던 원형 테이블이

내 책상이었던 그 좁은 아파트 공부방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원장님이 보조키를 주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장님은 학원을 개원했다.

여기가 최쌤 강의실이라며 학원에서 제법 넓은 강의실을 주셨다.


칠판이 화이트보드가 아니라 좋았다.

어느 철학관에서 나한테는 화이트보다 블랙보드가

더 잘 맞다고 이야기한 것이 생각났다.


'오, 첫 출발이 좋은데?'


그 블랙보드 앞에 서서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수학 과외 선생님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야 효진아! 너 대학 가서 과외 알바할 때 이 공식은 무조건 설명할 수 있어야 해!"

그때 나는 웃으며 그 말을 피해갔다. 가르치는 일은 내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시절 나는 정말 그랬다.

가르치는 일은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인생을 좌우하는 직업이라 생각했기에

더욱 내가 하면 안되는 일 같았다.


그런 일을 얇은 취업증명서와 맞바꿨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내 마음에 깃드는 가책을 질끈 감았다 뜬 눈으로

지워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어때. 그 일 하면 되지. 내가 아무나가 아니면 되잖아?"


사실 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하는 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처음 칠판 앞에서 했던 그 말을

나는 14년 동안 얼마만큼 지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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