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된 우연

by 모모제인
엄마, 나랑 마라탕 먹으러 가자.



부쩍 또래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한 아이가 금요일 저녁, 나를 부른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벌써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마라탕 가게에 간단다. 한 때 유행처럼 지나가는 음식이겠거니, 해서 딱히 먹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는데, 그래! 가보자! 하고 둘이 집을 나섰다. 어라! 이거 꽤 맛난 음식인걸, 하며 불금을 보내던 중이었다.


휴대폰에 대학원 동기의 번호가 떴다.

전화까지 할 정도면 무슨 일이지?

혹시 졸업 워크숍 같이 가자는 전화인가?


"오! 오빠 잘 지내시죠? 웬일이세용?"


워크숍 이야기를 기대했던 내게 뜻밖의 이야기를 한다.


"어, 모모야,

내가 아는 OO회사 팀장이 사람을 뽑는다네?

아직 공고 띄우기 전이라 생각 있으면 지원해 보라고"


"아, 그래요? 생각해 볼게요"

(마음의 소리)' 이게 말로만 듣던 인맥찬스?'


다시 직장인으로 살지 않겠다던 다짐은 어디 가고 그럴 생각은 없다는 대답 없이 통화를 끝냈다.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커리어에 대한 불안이 '나 여기 있어.' 하며 고개를 내민다.


그렇게 주말이 지났다.




벌써 4개월짜리 요가지도자 과정이 한 달 후면 끝이다.

실행을 미룰 핑곗거리가 곧 사라진다는 뜻이다.

배우고 싶은 것은 여전히 너무 많다.

하지만 실전이 곧 배움이라는 것을 모를 나이는 아니다.


클래스 기획안은 모두 짜여 있다.

내게 필요한 건 단지,

스스로 기획하고 발로 뛴 만큼의 성취감.

그뿐이다.

지금 나에겐 실패하더라도 잃을 게 별로 없다.


그런데 정작 주말 내내 밤잠을 설쳤다.

느닷없이 부동산 공포(?) 한번씩 닥친다.


이곳에서 수요가 받쳐줄 수 있을까?

이곳에서 어딘가로 출퇴근하려면 제약이 너무 큰데?

이 시점에 거주지를 옮기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내 거주지는 퇴직한 직장 코 앞이다.

육아와 직장, 현실적인 이유 하나만 보고

전에 살던 집을 매도하고 전세로 이사를 왔다.

당시 30% 시세 차익을 보고 팔았는데

지금은 그 가격의 두 배가 됐다.

상대적 박탈감.

열차는 떠나갔다


부자는 못 될 타이밍.

이곳에서 전세로 4년 살고 나서

2년 전에 풀 인테리어를 하고 들어온 지금 아파트는

내가 산 시점을 마지막으로 거래 절벽.

내가 산 가격이 실거래 최고가로 당당히 찍혀있다.


소득 수준이 높고 청년층 인구도 많은 곳이지만

도시의 인프라는 오직 하나의 기업에 집중되어 있다.

음식, 의료, 유통, 서비스들이 유행에 따라 흐르는 곳이 아니다.


다시 서울 근교로 돌아가고 싶어도

고려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이들 교육, 부동산 자금, 소비여력,

그리고 이제 40대가 된 우리 부부의 라이프 패턴까지.


이제는 은퇴를 고려한 설계가 필요할 것 같은데

몇 배 비싼 지역으로의 이사가 맞는 걸까.

과연 우리는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지난 결정이 후회되고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찼다.


과거는 집착이고 미래는 불안이라는 말이

딱 지금 하는 말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다.

아이비리그 출신 실리콘밸리 금융맨이 자기가 원하는 삶의 초대에 하나씩 응해가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에세이다. 뜻밖에 요가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제야 이 책이 요가 동료에게 추천받았다는 게 생각났다.


이 책을 보면서

또다시 요가의 쓸모를 확인한다.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이 조금 더 깊이 들이박힌다.


이런 걸 "의도된 우연"이라고 한다.

잠재된 의도가 우연을 가장하여 내 삶에 자꾸 끼어든다.

그리고 신념을 강화시킨다.

자연스러운 것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내 안에 있던 것이 스며 나와 나다운 나를 만든다.

내 곁에 두는 것이 나를 만든다.


그래.

꼭 이사를 가야만 뭔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게 불행의 이유는 결코 아니다.

이 곳에서의 일상은 안정되어 있다.




OO 오빠,
저 거기에 지원하지 않기로 했어요.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그나저나 워크숍은 참석할게요ㅋㅋ


나의 생각을 듣더니 동기오빠가 고개를 끄덕이며 네 생각에 맞는 방향으로 같이 고민해 보자, 한다.

과거의 집착과 미래의 불안에서부터

바로 지금, 오늘로 시야를 끌어당긴다.


부족한 게 하나 없다.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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