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으로 깡으로 사는 분이시죠?"
진맥 하던 한의사가 대뜸 묻는다.
"보통 선생님 같은 분들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못하게 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경향이 있어요. 젊을 때는 체력이 받쳐주니 괜찮지만 대부분은 나이가 들어가면 보통은 현실하고 타협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러지를 못하면 이렇게 허증(虛證)이 와요. 이렇게 복부 쪽을 눌러보면 맥박 뛰는 거 느껴지시죠? 이 정도면 심하시네요. 맥을 보니 평소 체력이 나쁘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 같지는 않고, 최근에 스트레스가 많았다거나.."
"아.. 올초까지 공황장애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괜찮아졌는데 최근에 운동을 시작해서 체력이 좀 달리나 보다 한 거였는데.."
"역시! 그런 게 있었군요. 증상은 없어졌어도 그 후유증이 몸에는 남아있었다고 봐야죠."
세상에! 내가 허증(虛證)이란다.
허증(虛證)
인체의 정기(正氣)가 부족하고 저항능력이 약해지며 생리기능이 감퇴된 증세. 기력결핍 ·신체허약으로 치유능력이 떨어지는 병증을 이르는 한의학 상의 표현.
- 출처. 두산백과
그동안 가족들 보약이라면 주기적으로 챙겼어도 그게 내 몸에도 필요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다 날씨 탓인가, 싶어서 아이들 약을 지어오던 한의원에 들른 차였다. 한의사가 하는 말을 들고 있자니 진맥만으로 성격을 맞추는 게 신기했던, 어릴 적 한약방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때 내 엄마도 잘하기로 입소문 난 한의원에 우리들을 주기적으로 데리고 다녔다. 당시 2시간 거리였던 목포까지 1년에 한두 번은 꼬박꼬박 다녔던 기억이 난다. 한의원은 오래된 시장 골목의 대로변에 있었다. 달큰한 한약냄새가 입구에서부터 나기 시작하면 나는 코를 막고 침 맞는 노인들 사이를 지나 진료실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맨 안 쪽에 위치한 원장실에는 알 수 없는 한자어로 된 두꺼운 책들과 인체 조감도 같은 사진,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의자 몇 개와 낡은 침상 하나가 있었다. 안경을 콧구멍 있는 데까지 내려쓴 나이 지긋하신 한의사는 내 손목을 짚어 잠시 기다렸다가는 점쟁이처럼 내 성격을 알아맞히곤 했다. 그때 그게 너무 신기해서 이 분이 의사가 맞는가 하며 갈 때마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너희들이 잔병치레가 없는 것은 신통한 한의원에서 일 년에 두 번씩 꼬박꼬박 보약을 해 먹인 덕분이라고 했다.
아마도 엄마랑 통화하며 기운이 없다는 말을 했었나 보다. 끊은 지 30분쯤 되고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엄마는 대뜸 아는 분이 하는 농장에서 흑염소를 했다며 나에게 전화가 올 거라고 한다. 평소 안 맞는 음식이나 체질 같은 걸 알려주면 좋은 국산 한약재도 같이 넣어서 보내준다고 했다. 아이 셋 키우며 워킹맘으로, 살림꾼으로, 누가 뭐라 안 해도 알아서 스스로 닦달하며 사는 딸내미를 항상 안타까워하던 엄마다. 딸내미 보약 한 채 해주겠다는데 괜찮다고 극도로 손사래를 치는 내게 엄마는 못내 서운하셨던 모양이다. 딸은 엄마에게 기운 없다는 이야기를 괜히 했다며 후회했다.
엄마는 흑염소 대신 내게 한약값을 보냈다.
의사는 가슴에 열을 내려주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
허증이 온 경우 오히려 약의 효능을 금방 본다고 했다.
마음의 병이 다 나은 줄 알았는데 한의원을 나서는 마음 한 켠이 헛헛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