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고학년 대치동 입성기
“휘”
199*년 3월,
대학교 캠퍼스는 새내기들이 입학하며 활기가 넘쳤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입학했던 9*년도의 3월은 세상의 싱그러움이란 싱그러움은 다 가져다 놓은 것처럼 기쁨이 새어 나오던 젊음의 공간이었다.
교문 앞 게시판마다 빨간 글씨로 쓰여있던 ‘휘’라는 글자.
휘문고에서 동문 모임을 알리는 대자보였다.
고등학교마다 동문회 대자보를 붙였지만, 그 시절 내 눈에 깊게 각인된 건 바로 휘문고의 빨간 글씨였던 것 같다.
락카로 쓱쓱 뿌려 다른 구구절절 설명 없이 ‘휘’라는 글자 하나로 알리는 모습에서 자랑스러워함이 보였다고 할까.
경기도의 인문계 고등학교, 내가 입학했던 대학교에는 전교생 통틀어 문과 한 명, 이과 한 명 사이좋게 두 명이 입학을 해서 동문회는 언감생심이었다.
내가 자라온 환경,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노력하면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믿었던 어린 시절.
애써 고등학교 동문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며 쿨한 척했지만 소위 서울의 명문 고등학교의 힘에 부러움을 느꼈던 첫 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대치동으로 이사
지금 이사 온 우리 집에서 코엑스 쪽으로 슬슬 걸어서 넘어가다 보면 휘문고등학교가 보인다.
그제는 휘문고등학교를 보는데 예전 부러움에 빨간 대자보를 바라보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엊그제 입학한 것 같은데.. 그게 벌써 이십여 년 전.
그동안 나는 대학에서 만난 친구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벌써 그 아이가 올해 6학년이 된다.
대치동으로 이사는 올해 1월. 아이의 5학년 학사과정을 모두 마치고, 3월에 6학년 신학기 맞춰 이사를 왔다.
아이에게 또래 친구도 없고, 나도 동네 친구 하나 없이 덩그러니 놓인 이 상황.
대치동의 빠른 진도와는 완전 별개로 마이웨이를 걷고 있는 아이의 학업 상황.
어디에서 정보를 얻어야 할지, 아이는 어떻게 적응을 시켜야 할지 막막한 상태다.
적어도 학습 공백이 있으면 안 되니 국어 영어 수학 학원은 어떻게 찾아서 넣기는 했는데, 누군가 맞장구 쳐주며 이게 최선이었다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이사 와서 두 달, 글로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이제 조금 살만해졌나 보다 싶다.
이 글은 우리 딸도, 남편도 읽지 않기를 바라며 쓰는 글.
답답한 마음이 들 때, 아니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하나씩 남겨보려고 한다.
대치동 와서 안도한 것
대치동에 와서 좋았던 점 중에 하나는 공부하는 아이들이 당연해 보이는 분위기라고 하겠다.
검은색 롱패딩을 입은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학원으로 이동하고, 도로에는 아이들을 픽업 혹은 드롭하는 차들로 가득하다.
어둠이 깔려 걱정되기도 할 시간인데, 학원가의 앞 도로는 이보다 더 안전할 수 없게 느껴진다.
아이들의 일탈은 버블티, 올리브영 화장 코너 그리고 아트박스 정도.
길을 걸어가면서도 손에 들린 메모장을 보며 공부하는 아이들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 동네.
예전 거주하던 곳에 중학교가 앞에 있었고, 큰 상가가 있었다.
그곳에는 늘 삼삼오오 아이들이 몰려있었고, 어김없이 담배를 피우는 무리들과 풀메이크업을 한 어린 여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솜털도 가시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 걱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우리네 어릴 적과 너무나도 변해버린 세대를 그대로 인정해야 는 건가 고민이 많았다.
이사를 오고 너무 감사한 것은 내 기준으로 걱정스러워 보이는 아이들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가끔 한껏 멋 부린 아이들도 보이지만, 크게 떠들고 욕설(?) 비슷한 것을 하는 아이들도 보이지만 모두들 삼삼오오 모여서 학원을 간다.
으슥한 골목길을 걷게 되었다. 저 멀리 편의점 앞에 덩치 큰 남자아이들이 대여섯 명 모여서 웃고 있었다. 손에 들린 길고 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역시나 여기도 담배 피우는 아이들이 있구나 혼자 생각했더랬다.
가까이 갔을 때 아이들 손에 들린 것이 핫바라는 것을 알고 혼자 속으로 얼마나 안도하고 웃었는지 모른다.
잘 활용하기만 하면 너무나도 안전하고 든든한 방패가 될 수 있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불안과 두려움
주말에도 집 앞에 가득한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우리 아이는 괜찮은지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엄습한다.
남편도 나도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곳을 나왔고, 공부를 하기 싫어서 안 해본 경험, 못해본 경험이 없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인성이 올바르기를 바랐고.. 또 아이 초등 저학년 때 남편 회사 일로 3년간 외국 생활을 하게 되어 그곳에서 적응하며 외국의 자유분방한 학교 생활과, 너도 소중하고 나도 소중하다는 아이 존중 문화를 깊.. 게 흡수하며 살았다.
한국에 4학년 때 복귀하게 되었는데 그때 느낀 당혹감이란.
이 얘긴 나중에 또 생각날 때 쓰기로 하고..
결론적으로 우리 아이는 선행이 전혀 안된 현행 하는 수준.
공부 잘했던 부모의 문제는 아이가 공부를 못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만.. 이 아니고 경험해 보지 않은 무지에서 오는 결점이라고 치자.
아이가 학교 수학 시험에서 70점대를 맞아왔을 때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말로는 인성이 중요하다, 공부 못해도 된다, 다른 잘하는 것이 있으면 된다 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아이를 향한 실망감으로 휩싸이고 있었다.
입으로는 괜찮다, 다음에 잘하면 된다 하였지만 나의 흔들리는 눈빛과 실망하는 표정을 섬세한 딸은 알아챘을 것 같다.
이런 상태로 대치동에 와도 되는 것일지, 괜히 잘하는 아이들과 비교해서 자존감만 떨어뜨리는 것이 아닐지.
그렇다고 무조건 푸시한다고 공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결국 공부는 자기 몫인 건데
대치동의 환경의 부작용이 분명 예상되기에 이사 결정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치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있는 이곳.
대한민국에서 욕 제일 많이 먹는다는 이곳.
그래서 이 글을 아무도 읽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고.
방 두 칸 작은 집 , 고민 끝에 이사 온 이곳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결론도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본 글.
낼모레 개학이다.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는 울 딸에게 만남의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