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은 기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등원시간이 대체로 9시 전후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처럼 고정된 시간표에 맞춰 수업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등원시간보다 조금 늦게 유치원에 오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때로는 이 등원시간을 꼭 지켜야 하는 날도 있습니다. 현장학습, 공연 관람, 체험 활동 등 특별한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 날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요. 이럴 땐 학부모에게 미리 등원시간에 대한 안내를 하는 것과 더불어 아이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는 편입니다. 내일은 이러이러한 일정이 있으니 유치원에 늦지 않게 와야 한다고 말이죠.
우리 반 첫 체험학습을 가기 전날, 늘 하던 대로 견학 장소와 등원 시간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선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제 앞에 와서는 이렇게 말해요.
“선생님, 저는 내일 아침에 늦어서 거기 가는 버스 못 탈 것 같아요.”
선아는 우리 반에서 가장 늦게 등원하는 아이입니다. 행사가 있을 때는 어떻게든 시간에 맞춰 오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날엔 친구들의 놀이가 한창 펼쳐지고 있을 때, 혹은 놀이를 마치고 정리해야 하는 시간에 주로 교실에 들어서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도 선아의 지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음에도 스스로가 가장 잘 압니다. 오늘도 또 늦었다는 것을요.
제 앞에 선 선아에게 괜찮다고, 내일은 엄마가 일찍 챙겨서 보내주실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건네보아도, 표정은 썩 나아지지가 않습니다.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점심시간이 되어 선아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밥을 먹으며 물었지요.
“왜 아침에 늦을 거라고 생각해, 선아야?”
선아에게는 다섯 살, 두 살 두 동생이 있습니다. 한 아이만 챙기기에도 바쁜 아침인데, 선아 엄마는 아이 셋을 챙기고 그중 둘을 유치원에 보내야 하니 그게 어디 보통 일이겠어요? 그러니 등원 시간을 맞추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아의 대답은 제 짐작과는 사뭇 달랐어요. 선아는 공부를 세 개 하느라 늦게 잠을 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엄마에게 이야기해 보겠다는 저의 말에 그 어떤 기대도, 희망도 가지지 않는 선아의 눈빛에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저렸습니다. 선아가 엄마에게 힘들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는 게 어떤 이유에서였을지 짐작이 가기도 했고요. 자신의 시도가 엄마에게 통하지 않을 것임을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렇게, 선아의 일곱 살은 일 년 내내 ‘공부’와 함께였습니다. 일찍 유치원에 온 날은 바쁜 날이라고 했습니다. 아침 공부를 못하고 왔으니 집에 가서 해야 한다고요. [단어 수집가] 그림책을 읽고 난 후 ‘내가 모으고 싶은 단어’에는 ‘공부’를 적었습니다. 공부를 모으면 잘할 수 있게 될 것 같다면서요. 추석에 ‘보름달에게 하고 싶은 말’ 활동을 할 땐 공부 잘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적었지요. 크리스마스 때 산타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물을 때면 답은 늘 한결같이 ‘공부’였어요.
저는 정말 알고 싶습니다. 선아의 공부는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만약 이것이 선아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면, 평생 한 번뿐인 선아의 일곱 살은 어디에서 보상을 받아야 할까요? 일곱 살의 삶은 성인의 삶보다 덜 중요한가요? 성인의 삶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쓰여도 괜찮은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