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말의 속도,마음의 속도
"당신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성격입니다."
MBTI 검사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는 감정보다는 사실을, 공감보다는 해결책을 중시한다.
효율성을 추구하고, 논리적 순서를 좋아한다.
말도 빠르고 직설적이다.
"넌 말하는 로봇 같아."
가끔 남편이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다.
그런 내가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존재를 키우고 있다.
"율이는 또래보다 언어 발달이 조금 느려요."
선생님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진다.
나는 펜을 꺼내 메모를 시작한다.
- 어휘량 부족
- 문장 구성 어려움
- 표현 욕구는 있으나 방법 모름
"집에서는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요?"
나는 즉시 해결책을 요구한다.
"아이와 많은 대화를..."
"구체적으로요?"
"책을 읽어주시고..."
"몇 분 정도요? 어떤 책이요?"
선생님이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다.
"율이야, 이거 뭐야?"
사과 그림을 가리키며 묻는다.
"사과야. 사-과. 따라 해 봐."
나는 정확한 발음으로 천천히 말한다.
"공룡, 보여줄게 율이가 따라 해봐 사-."
"사..."
한 글자가 나오기까지 10초가 걸린다.
내 머릿속으로는 이미 다음 단어, 다음 문장이 준비되어 있는데
율이는 아직 첫음절에 머물러 있다.
어린이집에서 율이 친구가 선생님에게
신나게 하루 일과를 설명한다.
"선생님, 오늘 친구랑 블록 쌓았어! 근데 무너져서 속상했어.
그래서 다시 만들었는데 더 높게 쌓았어!"
율이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본다.
"율이는 오늘 뭐 했어?"
선생님이 친근하게 묻는다.
"어... 음..."
율이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율이 대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참는다.
# 화가 나는 순간들
"율이야, 뭐가 아픈지 말해봐."
율이가 울고 있지만 이유를 모르겠다.
"응... 여기..."
손으로 막연히 가리킨다.
"여기가 어디야? 배? 머리?"
나는 점점 목소리가 높아진다.
율이는 더 울기만 한다.
이럴 때마다 나는 답답해진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해결될 문제인데,
율이는 논리보다는 감정으로 반응한다.
어느 날 밤, 율이가 잠든 모습을 바라본다.
작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고,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문득 생각한다.
내가 말이 빠른 건 정말 장점일까?
빠르게 던지는 내 말들을
율이는 얼마나 알아듣고 있을까?
나는 효율성을 중시하지만,
율이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엄마."
어느 날 율이가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응?"
"고마워."
짧은 두 글자지만,
율이가 혼자 힘으로 해낸 완전한 문장이다.
그 순간 내 가슴이 뭉클해진다.
T 100%인 내가 감정에 휩싸이는 순간이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것들을 추구한다.
빠른 결정, 논리적 분석, 명확한 결과.
그런 내가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존재를
가장 사랑하고 있다.
예측 불가능하고, 논리 없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바로 율이를.
이상하게도 그 비효율성이
내게는 가장 소중하다.
율이는 말이 느리지만,
안기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나는 감정이 느리지만,
밤새 언어 교육 자료를 찾아보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율이는 "사과"라는 단어 하나를 배우는 데 일주일이 걸리지만,
나는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하는 데 일 년이 걸린다.
"율이가 많이 늘었어요."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어떤 부분이요?"
나는 여전히 구체적인 답을 원한다.
"표현하려는 의지가 강해졌어요.
그리고... 엄마를 많이 찾아요."
율이가 내 손을 꼭 잡고 있다.
"엄마... 좋아."
또 두 글자.
하지만 이번엔 내 마음을 완전히 흔든다.
이제 안다.
율이의 느린 말속에는
빠른 마음이 담겨 있다는 걸.
나의 느린 감정 속에는
깊은 사랑이 담겨 있다는 걸.
우리는 서로 다른 속도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배워가고 있다.
말이 느린 아이와 감정이 느린 엄마.
완벽하지 않지만,
우리만의 속도로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걸음이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