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연 지 2년을 이제 막 넘긴 곳이지만, 이곳의 미학은 ‘낡음’이다. ‘가장 새로운 것은 가장 오래된 것이다.’라는 입구의 문구처럼, 서점은 시간에서 사물의 가치를 찾는다. 오래된 책과 LP, 오디오와 컴퓨터, 전등과 시계는 그들이 지나온 세월만큼 서점을 풍성하게 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설득되는 공간이 있다. 무엇 하나 강요하지 않는데도 마치 그런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곳. 트렌디하다고 소개하지 않는데도 어느새 유행의 선두에 서 있고, 정겹다 표현하지 않는데 저절로 따스함을 느끼게 되는 곳. ‘북셀러’는 그런 서점이다. 밀도 있게 촘촘한 공기가 공간 안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책방은 입구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새로운 세계로 이송된 기분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얇은 커튼, 그 사이로 흘러드는 한낮의 햇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LP와 선풍기, 노랗게 색이 바랜 모니터와 타자기, 한때 부유함의 상징이었던 뻐꾸기 벽시계까지. 서점을 이루고 있는 세세한 요소들은 서로에게 덧입혀져 공간만의 독창적인 노스텔지어를 만든다. 그곳의 노스텔지어는 ‘우리가 경험해 본 적 없는 시간’이다. 한 번도 도달한 적 없지만, 생각할수록 아련해지는 과거의 과거. ‘그리움’이라는 단어에도 원형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것일 것만 같은,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사진만이 간직하는 닿을 수 없는 시간의 감성.
북셀러는 그런 노스텔지어의 감수성을 세심하게 재현한다. 작은 소품 하나까지도 고민하여 매만진 흔적이 역력한 이곳의 흡입력은 가히 대단해서, 문지방 하나를 경계에 두고 공기의 입자가 달라졌다고 생각될 정도다. 메마르고 각박한 현실에서 한 편의 서정시 안으로 걸어 들어간 듯한 느낌. 그러나 북셀러에서 느낄 수 있는 서정은 유럽의 보드라운 서정도, 하이쿠의 정형화된 서정도 아닌, 집필된 단단한 기개를 바탕으로 하는 굳건한 서정이다. 심지가 굳은 서정, 미래를 낙관할 이유가 있는 낭만.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확신 위에 도포된 서점만의 따뜻한 열정은, 서점 안으로 발을 한 걸음 내딛는 순간부터 희열로 입꼬리를 치솟게 한다.
당신의 몸에 독서인의 DNA 단 한 조각이라도 존재한다면, 북셀러 서점의 분위기를 접하는 순간부터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만약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만큼은 잃어버렸던 영감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글을 쓰지 않았다면 사진을 찍어 어딘가에라도 업로드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자연히 그렇게 돌변한다. 단어를 더듬어 찾고, 입술과 손가락을 바삐 놀리며 어떻게든 표현할 방도를 모색한다. (실제로 방문 당시 함께 있었던 손님 중 사진을 찍지 않은 손님은 없었다.) 책방의 손님들이 하나같이 들끓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밖으로 내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낡음의 미학이 안겨주는 대가 없는 친절함 때문이 아닐까. 잃어버린 지도 몰랐던 시간을 되돌려받은 느낌. 내 것인 줄도 몰랐던 미상의 추억을 선물 받은 느낌. 오래된 시간만이 안겨 줄 수 있는 넉넉한 인심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북셀러가 서점으로서, 공간으로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건 아마도 그만이 가지고 있는, 그런 고유한 따스함 때문일 것이다.
2. 보석 같은 책들을 발견할 수 있는 헌책방
보석 같은 책들이 즐비한 헌책방이다. 낡음의 미학을 간직한 책방에서는 책들 또한 시간을 담뿍 머금고 있다. 샛노란 빛으로 바랜 종이 위에는 한문과 국문이 혼재한 제목들이 빈번하게 눈에 띄고, 영문 초판본들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책방지기님이 운영하는 서점답게, 책방의 주된 장르는 문학이지만, 인문, 예술, 철학서와 산문집 등 문학과 유관한 분야의 책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책방의 블라인드 북 또한 민음사, 문학동네, 문학과 사회 등 유명 출판사의 초판본 시집으로 꾸려져 있으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펭귄 클래식 시리즈, 계몽사 소년 소녀 세계문학전집 등의 전집 시리즈도 책장을 채우고 있다.
신중하게 선별해 들여오는 책 큐레이션은 분야와 장르를 막론하고 한 분야에 정통한 서적들이 대부분이다. 대중 교양서나 실용 인문서, ‘하루 만에, 가볍게 읽는, 쉽게 시작하는’ 등의 수식어를 달고 있는 해설서가 아닌, 오랜 시간을 걸쳐 집필된 책들. 제3자가 개입하지 않는 석학의 오리지널리티가 그대로 살아있는 책들이 유독 많다. 저자 본연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 많다는 건, 타 서점과 구별되는 북셀러만의 중요한 포인트다. 화려한 디자인이나 눈을 사로잡는 문구가 아닌 온전히 내용으로 독자에게 다가서는 책들이 많다는 것. 헤세, 괴테, 프로이트, 발저 등의 본연의 목소리가 살아있는 책들은 두말할 것 없는 인류의 유산이지만, 생각보다 이런 책들을 서점에서 펼쳐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특히나 유명세가 대단하지 않은 인문 사상가의 책은 애석하게도 종종 대형 서점에서조차 구하기 어려우며, 오로지 온라인으로만 주문할 수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쨌든 서점은 팔리는 책을 가장 우선순위로 매대를 채우기 때문이다. 그런 풍조가 만연한 현재, 책의 겉모습이 아닌 본연의 가치를 알아보고, 중고로 책을 사들이며, 독자를 위해 그 책들을 다시 진열하는 서점은 희소하다. 귀하다. 북셀러는,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서점이다.
3. 북셀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별한 몇 가지
북셀러에는 이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다. ‘무무당, 한 칸 서점, 저렴한 가격의 카페’. ‘무무당(無無堂)’은 북셀러 입구에 있는 24시간 무인 책 판매소로, 대구 방천시장 내에 위치한 서점의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독특한 공간이다. 방천시장은 야시장이 활발한 곳으로 낮 못지않게 밤에도 적잖은 인파가 오가는 곳인데, 책방지기님은 밤에 시장을 방문한 이들도 책을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책방 앞에 무무당을 세웠다고 한다. ‘주인과 시간이 없다’라는 뜻의 ‘무무당’은 주인 없이 24시간 운영된다는 것이 특징인데, 덕분에 서점을 오가는 사람들은 시간과 주인의 눈길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책장의 책을 꺼내 볼 수 있다. 책장의 책들은 모두 헌책들이며, 열람뿐만 아니라 아주 저렴한 가격(2천 원)에 구매도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자기만의 칸’이라는 이름의 한 칸 서점도 운영 중인데,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을 패러디한 ‘자기만의 칸’은 한 칸마다 각기 다른 주인이 있는 공유 서점이다. 보증금 만 원, 월세 오천 원이라는, 공유 서점치고 다소 파격적인 가격 정책으로 운영되는 이곳의 목적은 돈벌이가 아닌 공간과 경험의 공유에 있다.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큰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도록 서점의 작은 공간을 내어주겠다는 다짐. 출발하는 마음과 함께 걸으며 지지하고 응원해주겠다는 마음. 북셀러의 ‘자기만의 칸’은 그런 결심 아래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책방은 카페 또한 손님 친화적이다. 북셀러에서는 커피와 차 등 간단한 서너 가지 음료를 판매하는데, 아무리 비싸도 4,000원이 넘지 않는 책방의 가격표를 보고 있노라면 이 시대에 이런 곳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가격이 저렴하다고 해서 맛이 그에 비례하느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책방의 티는 기분 좋게 달콤하고 맛이 좋으며, 차와 함께 나오는 몇 조각의 비스킷은 책을 탐방하며 지친 심신을 달래주기에 안성맞춤이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책 한 권 사서 근처 카페 가서 읽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책을 읽으며 음료를 마시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다. 맛의 취향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고급 로스팅이나 티 셀렉션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곳의 음료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책방 마지막 Comment
내 것인 줄 몰랐던 과거가 그리워지고,
잊어버린 지 몰랐던 추억에 잠겨 시간을 서성이게 되는 서점.
이제는 빛이 바랜 서점의 헌책들에는
과거 한 시절을 풍미한 작가들의 언어가 최소한의 번역과 왜곡을 거쳐
가장 본연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그들의 말은 낯선 기억을 헤매는 여행자의 좋은 길벗이 되어 준다.
설레는 마음을 다독이고, 알지 못했던 혜안을 안겨 준다.
그렇게 귀한 문장들을 더듬어 읽어나가다 보면,
문득 이곳 책방의 초입에 적혀 있는 한 줄의 문장이 떠오른다.
‘The newest is the oldest.’ 가장 새삼스러운 발견은, 우리가 본디 알고 있는 것들에서 발생한다. (필자 의역)
날것의 노스텔지어를 세공해 탄생시킨 책방만의 오리지널리티.
북셀러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과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간파한 서점이다. 그래서 이곳은 한번 발을 들이면 쉽게 헤어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