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병에 걸려 버린 어른의 판타스틱 원더랜드, 중2병 감성의 판타지 전문 책방, 서점 마계
오늘의 서점
중2병 감성의 판타지 전문 책방, 서점 마계
책방 포인트 3가지
1. 마계 인천의 중2병 감성 서점
인천에 있는 중2병 감성의 서점이다. 악동들이 넘치는 동네라는 의미에서 암암리에 붙여진 지역의 별칭, ‘마계’를 상호로 소화한 이곳은, 이름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컨셉을 지니고 있다. ‘중2병 감성’으로 단단히 무장한 공간에서는 ‘나조차 나를 감당할 수 없어’나 ‘음악은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 ‘왼손에는 흑염룡’과 같은 시답지 않은 유머가 난무하고, 중2병의 특징과 그들이 쓰는 언어(=단어와 용례)를 모아 둔 ‘중2병 대사전’도 구비되어 있다. 공간의 당당한 중2병스러운 태도에 서점을 둘러보다 보면 속절없이 피식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진정한 중2병 손님이라면 아마도 이쯤에서 허탈한 미소와 함께 ‘제길, 웃고 말았어’라며 덧붙여 중얼거릴지도 모르겠다.)
중2병에 걸리지 않았거나, 이미 치유된 사람의 눈에는 자칫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는 서점이지만, 이곳의 유머에는 겉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위트가 담겨 있다. 서점이 표방하는 중2병 감성은 덮어놓고 반항하는, 공격적인 적대감이 아니라, 10대 초반의 나이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익살스러움과 천진난만함에 가깝다. 중2병의 주요 특징으로 언급되는 어처구니없는 자아도취와 지나치리만치 솔직한 자기 고백은 사실 어른이 되면 제일 먼저 잃게 되는 청춘의 가치다. 반대로 말하면 ‘순수하기에 담대할 수 있는 패기, 어리숙하더라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는 오로지 중2에게만 용납되는, 그들만이 표출할 수 있는 감정인 셈이다. 그래서 책방지기는 일부러 중2병을 서점의 컨셉으로 삼았다고 한다. 어른으로 거듭나며 틀림없이 잃게 되는 감성을 공간에 담아 어른에게도 해방감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서. 오직 그들만의 산물인 자유로움을 모든 연령층이 다 함께 즐길 수 있게 하고 싶어서.
2. 판타지, SF, 게임, 그리고 아트북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서점의 방향성은 책에서도 잘 나타난다. 서점 마계는 ‘판타지 전문 책방’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서가의 90% 이상이 판타지 관련 서적이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왕좌의 게임, 나니아 연대기’ 등의 판타지, ‘듄, 삼체’와 같은 SF, 크툴루 신화로 대표되는 러브크래프트 전집, ‘스즈메의 문단속, 날씨의 아이’와 같이 일본 애니 원작 소설 등 동서양을 가리지 않은 판타지 작품들이 책장을 채우고 있었다. 타 서점에서 자주 볼 수 없는 희귀 서적들도 있었는데,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 어쌔씬 크리드’와 같은 유명 게임 원작 소설들과 기예르모 델 토르, 해리포터 영화와 같은 유명 IP의 작업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아트북이 그러했다. 판타지 전문 서점인 만큼 고급 양장본과 특별 합본 등 희귀 판본도 있었으며, 판타지 세계관 작법서와 괴수 대백과 사전처럼 자신만의 판타지를 시작할 수 있게 돕는 서적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서점이 여러 장르 중 판타지를 주요 장르로 선택한 데에는 중2병 컨셉과 연결되는 지점들이 많다. 판타지는 기본적으로 현재를 탈피하고 싶은 마음, 틀에 박힌 고루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소망에서 출발하는 장르다. 주인공은 대체적으로 기존 세계의 어떤 부분 혹은 전체에 저항하며, 비뚤어진 세상을 전복시켜 원하는 목표를 쟁취해 나간다. 그러면서 주인공의 세계는, 그곳이 어디든, 주인공의 모험 덕에 한층 정의롭고 성장한 사회로 거듭나게 된다. 겉보기에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가 현실의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이처럼 일상에서 억눌린 심리적 지점들을 해소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꿈꾸고, 마음에 품었던 반발심을 ‘이세계’라는 핑계를 앞세워 해결하는 판타지는, 중2라는 나이를 무기 삼아 하고픈 말을 직설적으로 표출하는 중2병 감성의 언어와 매우 흡사하다. (물론, 판타지가 중2병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은유적이며, 높은 완성도를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판타지 장르는 ‘서점 마계’라는 공간과 정말 잘 어울렸다. 현실적이진 않지만, 현실에서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되는 어떤 감성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3. 130년 역사를 가진, 시와 예술의 공간
무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인천 개항장터의 고건물을 개조한 서점이다. 서점 마계가 있는 목조 건물은 미국계 무역상사 타운센드(Townsend) 상회가 1892년 세운 것으로, 한국 최초로 스팀 정미기를 도입한 근대식 정미소 ‘담손이 방앗간’의 일부였다고 한다. 한때 제국주의 수탈의 거점지였던 공간은 독립 이후 수많은 세월을 거친 현재, 한국의 명암을 간직한 인천의 문화시설로 지정되었다.
서점은 건물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를 고스란히 내보이기 위해 8개월이 넘는 시간을 오롯이 인테리어에 투자했다고 한다. 목조 건물임을 알리는 천장 골조를 최대한 살리고, 골조에 어울리는 목조 분위기를 설계하는 데까지 몇 개월의 시간 투자는 필수적이었다고. 오랜 노력을 들인 덕분에 서점은 ‘판타지 서점 마계’라는 이름에 적합한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약간은 어둑하고, 조금은 신비스러우며, 기나긴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법한 그런 곳으로.
동인천의 문화 거점지로 다시 태어난 서점에서는 음악 공연과 낭독극, 사진전 같이 지역 시민들을 위한 문화 행사들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부천의 문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서점인 만큼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출간된 출판물(<당신의 라떼>, <여기서 커피>, <부평, 예술 모험 대사전>)들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알발리 출판사’라는 출판사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서점에서는 알발리 출판사만의 독자적인 시집(<내 마음이 지옥 같아서> 외)들도 찾아볼 수 있다. 서점은 앞으로도 음악과 시, 예술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 지역에 자리매김하기를 소망한다고 한다. 함께 모여 세상을 더 풍요로운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판타지 소설 특유의 희망을, 서점 마계는 현실에서 지역 주민들과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