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책 보러 갔는데 책 기억이 별로 없는, 2023 국제도서전
큰 욕심은 없었다. 약 10년 만에 다시 찾은 국제도서전이었다. 잘 알지 못하니 무얼 해야겠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 그래서 ‘2023 국제도서전에서 해야 할 목록’은 비교적 짧았다. 목록을 요약하면 대략 이러했다.
1. 재밌게 구경하기
2. 즐겁게 시간 보내기 (=놀기)
3. 새로 만들 책의 표지 디자인에 대한 영감 얻기
1번과 2번은 사실상 같은 내용이므로, 그나마 가장 중요한 건 3번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쭉 읽으면 알겠지만, 사실상 3번도 그다지 의미가 없는 항목이었다. 1번과 2번 항목을 (너무) 잘 수행하느라 새 책에 대한 영감은 쥐뿔도 얻지 못했기 때문.
비록 표지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진 않았지만, ‘영감’님의 도포 자락 끄트머리 정도는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좀 재미없는 부연이지만, 여기서 영감님을 정말 수염 휘날리는 영감님으로 아신 분은 없으시리라 믿겠다.) 활기차고 역동적인 분위기는 분명 삶에 좋은 원천이 된다. ‘영감’님은 본래 흥이 많아서 흥 많은 사람 틈 사이에 계시길 좋아하기 때문에, 활기찬 분위기 속에 들어가면 언제나 영감님의 도포 자락이 인근에서 휘날린다.
2023년의 국제도서전. 약 3년 만에 드디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행사다. 코씨의 방문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에 열린 행사인 만큼, 국제도서전의 모든 곳은 북적거렸다. 코엑스 홀이 절대 작은 게 아닌데도, 내딛는 모든 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꽉꽉. (극 I인 나로서는 걸어만 다녀도 기가 쭉쭉 빨렸다.) 대한민국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상투적인 뉴스들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읽고 듣고 보던 말들이 거짓이었나 싶은 의심이 슬슬 피어올랐다. 그날, 그곳에서 ‘책’의 인기는 상당했다. 실존적 위기를 겪는다는 뉴스의 고민이 무색하게, 정말 많은 인파가 오직 ‘책’을 위해 모여들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치고 인내하며 다녀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그만큼 볼거리도 많았다. (그러지 않았으면 그 많은 사람들이 몰리지도 않았겠지.) ‘다시 열린 축제’라는 명성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것처럼, 모든 부스는 알찬 이벤트와 패기 넘치는 홍보를 진행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둘러보게 되었던 건, 당연하지만 거대한 부스들이었다. 국제도서전에 방문한 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유명 출판사의 부스와 유명 IP를 테마로 한 이벤트 부스들. ‘2023 국제도서전’이라고 검색만 하면 상단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진 찍고 싶고, 사진을 찍어야 할 것만 같은’ 곳들이었다. 물론, 나도 그곳에서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다. 하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이곳에 온 목적은 ‘이미 유명한 무언가에 취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기회들에 기꺼이 응했다. 나를 제일 먼저 붙잡은 건 종이 제작사(<두성종이>)였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길을 걷다 말 그대로 부스 직원분께 ‘붙잡혔다’. 새로 나온 친환경 종이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셨고, 난 열심히 들었다. 그렇게 알게 된 종이가 ‘프런티어 터프’. 이전보다 경량화되었고, 친환경으로 만들어진 제지라고 했다. 지금의 나는 비록 종이를 고를 수 있는 처지도, 입장도 아니다. (그린라이트, 이라이트를 속지로 쓰고 싶지만 그마저도 못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모조지를 골라야 하는 처지니, 뭐.) 하지만 책을 만들고, 앞으로도 꾸준히 만들어내고 싶은 사람이 재료에 대해서 하나라도 더 아는 건 좋은 일이니까 일단 설명은 열심히 들었다.
다음은 소소한 이벤트에 붙잡혔다. 사실, 붙잡혔다기보다는 자발적으로 걸어가 붙들린 것에 가까웠다. <솟대 커뮤니케이션> 부스에서 진행하던 작은 이벤트는 ‘공부는/삶은 ( )다’의 형식으로 공부나 삶에 대해 한 줄로 정의하는 것이었는데. 둘 다 할 말이 정말 많은 단어여서 매우 간단히 답을 써낼 수 있었다. 1초의 고민 없이 적어 내려간 내 답을 보고서, 이벤트 진행하시던 분은 ‘우아악’하고 웃으셨다. (혹시라도 필자가 뭐라고 썼는지 궁금하다면, 영상 속에 답이 있다.)
재미난 부스도 만났다. <유스이즘(Youth-ism)>이라는 독립출판 부스였는데, 작가들이 모두 10대라는 어마무시한(?) 사실을 간직한 곳이었다. (현재는 작가들 중 3명이 20대가 되었다고.) 10대 작가들이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제작까지 했다는 책들이라는데.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그런 배경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만듦새가 좋았다. 장르도 소설부터 에세이, 동화까지 다양했다. 정말 자라나는 청춘들은 위대하다. 어릴 때 가끔 어른들이 날 보고 놀라면 ‘그렇게까지 놀랄 일도 아닌데...’라며 혼자 속으로 건방을 떨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어린 친구들을 보고 놀라고 있다. (인류 진화의 위대함을 세대마다 급변하는 능력치로 체감하는 중이다.) 여튼, 난 부스를 떠나며 하릴없이 누워있던 내 어린 날에 조의를 표했다. (내 과거 눈 감아,)
그 외에 책을 테마로 한 소품샵들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왜 앞에는 단수였는데 이것만 복수냐고 묻는다면. 노코멘트하겠다.) 디퓨저나 텀블러, 머그컵, 향수, 책갈피, 가방, 볼펜, 노트 등등. 책과 글귀를 테마로 한 귀엽고 예쁘고 세련된 물건들은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다. 글을 읽고, 쓰고, 만들려고 마음 먹은 입장에서 글이 아닌 것들에 더 이끌린다는 건. 하지만 어쩌겠는가. 눈은 본디 직관적인 미감 앞에서는 어떠한 의지보다도 잽싸다. 취향에 맞는 소품들 앞에서 서성이는 건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다. (라는 합리화 잘 들었습니다.)
다행히 본능에 오래 잠식되지는 않았다. 물질에 대한 탐욕을 미처 버리지 못한 속세의 1인은 가까스로 국제도서전에 온 본 목적을 기억해 냈다. 다행히 가끔씩 고삐가 풀리는 소유욕이 발동하지 않아 그때까지는 빈손이었고, 곳곳에 흘리고 다녔던 정신을 주섬주섬 챙기고서 본래 가고자 했던 곳으로 향했다. 나의 최종 목적지는 B홀, 메인 이벤트가 열리는 곳이다. (진짜 메인 이벤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메인 이벤트였다. 전지적 1인칭 시점에서 쓰는 글이니 용어 정도는 쓰는 사람 마음대로라는 점, 유의해 주길 바란다.)
B홀로 들어서는 넓은 길목에서 반가운 코너를 발견했다. ‘도심 속 쉼표, 경기도書’ 부스. 경기도와 경기도콘텐츠진흥원(경콘진)에서 공동 주최한 부스는 경기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출판사의 책들과 책방을 소개하는 공간이었다. 국제도서전에서 책방 관련 부스를 마주칠 줄은 몰랐던 터라, 난 부스를 보자마자 몹시 신이 났다. 최근 들어 책방을 다니고 있는 나를 위한 맞춤형 부스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여덟 개 남짓한 부스들을 찬찬히 살피던 중, 유독 눈길을 사로잡은 부스가 있었다. 이름에서부터 책방의 성격이 아주 적확하게 드러나는 책방. ‘탐조책방’의 부스였다. 탐조와 책방이라는 생소한 조합이라니. 하나는 야외에서 벌어지는 관찰이고, 다른 하나는 높은 확률로 실내에 있는 공간인데, 그 둘이 이어진 공간이 어떨지 잘 상상이 되질 않았다. 다른 곳은 몰라도 저곳은 꼭 한 번 방문해 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어 책방의 명함을 챙겼다.
그리고 드디어. 길고 긴 우회로 끝에 도착한 오늘의 메인 이벤트. ‘책마을’에 도착했다. 책마을은 독립출판물과 아트북을 위해 마련된 ‘임시 마을’이다. 다양한 모습의 책 제작자들은 국제도서전이 열리는 5일 동안 책마을에 각자의 책을 위한 집을 짓고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책마을에는 수많은 집들(테이블 부스들)이 있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의 거리는 한 뼘도 안 될 정도로 좁았는데, 좁은 거리마다 각기 다른 색깔과 개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조용히 구경만 해도 공기의 분위기에 압도될 지경이었다. 또 그곳의 사람들은 활달했다. 소심쟁이 내향인(=나)이 분위기에 휩쓸려 낯선 이와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책마을에서는 활발한 소통이 내뱉는 숨처럼 자연스러웠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예전에 읽었던 책의 작가님을 만나서 인사를 나눴고(<고어라운드>), 용기를 주는 문구를 건네는 여행 작가님이 운영하시는 부스를 둘러보았고(<해해북스>), 부스마다 있는 귀여운 일러스트 그림과 굿즈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부스가 있다. 국제도서전에서 돌아온 지 2주가 넘었지만, 그곳에서 보았던 책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 선명하고 또렷하다. 부스 이름은 <케플러49 (Kepler49)>. 아트북과 팝업북 출판사였는데, 그곳에는 네 권의 책과 두 분의 작가님들이 계셨다. 네 권의 책들 중 내가 방문했던 날 전면에 나와 있던 책은, 지구 최초로 우주로 나간 개를 다룬 <주츠카, 쿠드랴프카, 라이카 - 어느 이름 없는 개 이야기>와 지금은 멸종된 독도의 바다사자 강치를 다룬 <돌섬, 바다의 노래>였다.
<케플러49> 부스에는 책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굿즈나 이벤트 등 눈을 현혹하는 화려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부스는 뭐랄까, 마치 메뉴가 하나뿐인 식당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곳에 들어서면 이미 알지 않는가. 자리에 앉기 전부터 ‘이곳은 맛집이다.’라고.
우선 ‘아트북’과 ‘팝업북’이라는 소재는 사람을 단시간에 감탄시키는 강력한 무기였다. 2차원의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튀어 올라오는 멋진 그림과 움직이는 설계들. 눈을 자극하는 직관적인 미감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람을 저도 모르게 멈춰 서게 만든다. 그렇게 잠시 서 있노라면, 부스에 계신 작가님들이 다가와 책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책의 전반적인 서사는 물론, 아트 팝업북 군데군데 숨어 있는 작은 요소들까지 직접 시연하여 보여주신다. 일종의 아트북 도슨트를 해 주시는 것. 영화를 더 재밌게 보려면 제작진(감독, 배우 등등) 코멘터리를 듣고, 그림을 더 재밌게 보려면 도슨트를 들으라고 했다. (누가 한 말이냐면 내가 한 말이다.)그러니 눈앞에서 책에 대해 시시콜콜한 것들을 설명해 주시니 얼마나 재밌었겠는가. 더군다나 부스 작가님들께서는 목소리도 낭랑하시고, 말재주가 좋으셔서 더 듣는 맛이 있었다.
아래는 <케플러49> 부스에 있던 책들 중 한 권인 <돌섬, 바다의 노래>에 대한 설명이다. 책의 작가님인 ‘주민정 작가님’께서 열정적으로 말씀해 주신 부분을 모두 면밀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 봤다.
독도는 수많은 생물들의 서식지에요. 독도라는 영토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계시지만, 그 안에 사는 생물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이 책을 만들게 되었어요. <돌섬, 바다의 노래>는 독도의 동식물을 그린 책이에요. 책은 페이지마다 독도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담고 있어요. 그리고 책에는 숨은 주인공이 있는데요. 지금은 사라진 독도의 바다사자 ‘강치’예요. 강치는 일제의 남획으로 멸종되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들키지 않았을 뿐 (저는) 강치가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 숨 쉬고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책 마지막에 강치를 숨겨 두었답니다. 책의 마지막을 펼치면 숨어 있던 강치가 나오고, 강치가 담긴 책날개를 펼친 채로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면 그의 시선이 깃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돼요. 독도에서의 하루가 이번에는 강치와 함께 진행되는 거예요. 여태 보았던 이야기들이 강치의 눈으로 다시 읽히게 되는 거죠.
<돌섬, 바다의 노래>
주민정 작가
B홀에서는 이 밖에도 책에 대한 여러 기획 전시들이 있었다. ‘한국의 아름다운 책’과 리뉴얼된 책의 표지를 선보이는 ‘리커버 북’, 건강한 식생활을 고민하는 ‘기후미식’을 비롯해 2023년의 주제, ‘비인간’에 대한 도서 전시도 진행 중이었다.
2023 국제도서전의 주제를 담은 <비인간, 인간을 넘어 인간으로 (NONHUMAN)> 전시는 ‘사라지다, 저항하다, 가속하다, 교차하다, 가능하다’라는 다섯 가지 층위로 책들을 분류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한다. 전시관 중앙에서 교차하는 수많은 판넬에는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문장을 좇다 보면 그 문장을 담은 책으로 이어지고, 책을 읽다 보면 인간 사회를 넘어서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연쇄적인 구조의 체험형 전시였다.
‘문장은 우리를 낯선 세계로 인도합니다.’ 전시관의 수없이 많은 문장들 중, 난 전시의 주요 컨셉이 담긴 그 문장이 가장 좋았다. 문장이 품은 의미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도 있지만, 동시에 그날의 내 기분을 함축해 놓은 말 같기도 해서였다. 다만, 내 경우에는 ‘문장’ 앞에 ‘책’이라는 전제가 아닌, ‘사람의 말’이라는 전제가 와야 할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2023 국제도서전. 딱히 큰 포부나 목표는 없었다. 오랜만에 책을 잔뜩 구경이나 하고, 혹시라도 영감님을 보면 참으로 땡큐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향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둘 중 어느 것도 난 제대로 한 게 없다. 구경을 제대로 했다고 하기에는 모든 부스를 들른 것도 아니며, 영감님은 사람들 틈에서 금세 지쳐 버린 나의 몸 상태가 괘씸했는지 도포 자락만 슬쩍 흔들다 멀어지셨다.
결국 남은 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 말속에 스며든 몇몇 책들 뿐이다. 무수히 많은 책들이 눈앞에서 흘러갔지만, 역설적이게도 낯선 세계로의 시야를 트이게 해 준 건 책 속의 문장이 아닌 사람의 말속에 담긴 문장이었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 그들이 쓴 책만큼이나 유려하게 풀어낸 말의 단어들 속에서 나는 낯선 세계를 보았다. 언뜻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난 이걸 자연스러운 결과로 해석하고 싶다. 우리를 낯선 세계로 이끄는 책 속의 문장도 결국 누군가로부터 비롯된 것이니까. 사람은 종이 속 단어들의 살아있는 실체니까. 그들의 말은 기록되지만 않았을 뿐, 책 속의 문장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 난 그날을 이렇게 해석할 거다. ‘미처 글로 적히지 못한 수많은 책들과 조우하고 왔다.’라고. 앞으로 세상에 나올 무한한 생각의 가능성을 보고 왔다고. 그래서 참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