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만으로도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다. 일면식도 없이 몇 자의 단어만으로 매력을 발산할 수 있다는 건 실로 대단한 능력이지만, 사실 그런 능력자들은 우리 주변에 편재해 있다. 특히나 ‘인스타그램’ 같이, 자신을 한껏 뽐내는 플랫폼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진다.
우후죽순으로 돋아나는 사람들의 모양을 평가하려는 게 아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사람의 수가 그렇게나 많음에도 모두가 일률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감탄하려는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매력 넘치는 사람들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매력은 가지각색이다. 그래서 SNS는 보는 맛이 있다. 여러 단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개인의 목소리가 진솔하게 표출되는 공간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의 다채로운 색깔이 담겨 있다. 가볍게 지나쳐 버렸던 겉모습에 숨겨진, 누군가의 반짝임이 들어 있다.
오늘의 책방, 피넛버터팔콘을 가기로 결심한 이유다. 내 책이 입고된 책방을 모두 방문한 후부터, 나는 한동안 인터넷을 돌아다녔다. 갈 만한 책방을 찾기 위해서다. 여태까지는 내 책이 입고된 책방만을 다녔던지라, 어디를 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그저 주어진 목록들을 따라다니기만 하면 됐을 뿐. 하지만 길게만 보였던 목록은 금세 바닥이 나 버렸고, 난 어느새 허허벌판 한복판에 내팽개쳐졌다.
인스타그램을 강박적으로 뒤지던 것도 그때쯤이다. 수많은 책방의 피드를 복잡한 심경으로 살폈다. 마음이 복잡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어느 서점을 가야 좋을지에 대한 고민과 둘째, 그 서점이 과연 나의 방문을 허락할지에 대한 불안. 그 두 가지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휘저었다. 모든 가게가 그러하듯, 서점도 누군가가 꾸리는 개인의 공간이다. 사유지나 가정집처럼 완전히 프라이빗한 공간이 아니어서 그렇지, 매일 손님을 받기 위해 일정 시간을 열어 두어서 그렇지, 가게는 엄연히 개인에 귀속된 공간이다. 그러니 가게의 출입을 결정할 수 있는 건 결국 가게의 주인이다. 달리 말하자면, 책방 방문과 촬영은 책방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책방 주인이 날 들여보내 줄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난 유명인도 아니고, 대단한 콘텐츠를 만들지도 않는다. 그저 책방을 돌아다니면서 공간을 감상하고, 경험을 영상과 글로 옮겨 담는 뜨내기일 뿐. 그렇게 낯선 사람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들고 찾아와, 책방을 찍겠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 같아도 싫겠다.) 그래서 책방을 검색하는 내내 마음속에는 걱정과 고민이 쌓여 갔다. 대체 어떤 책방이 나의 방문을 허락해줄까 하는 고민만 늘어났다.
서점 피넛버터팔콘의 피드를 발견한 건 그때쯤이다. 가장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책방지기님의 필력이었다. 보통 사진에 먼저 눈이 가는 인스타그램 플랫폼 성격상, 그 아래 있는 글을 꼼꼼하게 읽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피넛버터팔콘 책방 피드에 있던 글은 달랐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출 수 없는, 다음 글을 자꾸만 찾아보게 되는 그런 말들이 가득했다.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책방에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방이 정확히 어디에 있고, 어떤 특성이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차차 알아가면 될 문제고.) 일단 이렇게 재치 넘치고 매력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 운영하는 책방이라면 더 늦기 전에 반드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방에 냅다 연락을 날렸다. 아 물론, 뭐 전화나 이메일 같은 엄청난 수단을 통했던 건 아니다. 그냥 소심하게 인스타로 DM을 슬쩍 찔러 넣었다.
피넛버터팔콘은 내 책이 입고되지 않은 첫 번째 서점 중, 촬영 문의를 넣은 첫 번째 서점이었다. 일단 내가 누구인지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야 하는 곳.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곳에 방문 요청을 넣으려니 상당히 떨렸다. 요청을 거절당할까 봐서. 물론, 거절당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어차피 결정권은 내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달모나 채널과 주인장 모나는 전적으로 책방지기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래도, 그래도 이왕이면 거절보다는 수락을 받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얼마쯤 초조하게 있었을까. 오마이갓. 오마이갓. 오케이 사인이 날아왔다. 진짜 DM을 보낸 지 십 분도 채 안 되어서. (아닌가. 십 분은 넘었나. 아니다. 아마 안 넘었을 것이다. 사실 모른다. 하지만 체감상 십 분도 안 된 짧은 시간이었다.) 책방 영업시간에 연락했던 게 아니라서 좀 기다려야 답을 받을 수 있겠거니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렇게나 빨리 답이 오다니! (기쁨의 내적 표효와 댄스의 콜라보) 다음은 뭐겠는가. 약속 날짜 잡고 책방으로 튀어가는 거지. 힛. (OvO. 최대한 기쁜 얼굴을 문자로 표현해 봤습니다.)
피넛버터팔콘은 수원 광교에 있는 서점이다. 법조타운 안에 있어서 주변은 온통 빌딩 숲이지만, 서점 피넛버터팔콘은 회색이 가득한 배경 속에서 홀로 나무처럼 자라나 있었다. 짙은 고동색의 책장과 책상 그리고 피아노. 포근한 노란 조명이 만드는 분위기는 냉랭한 사무실 단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안락함이 머물고 있었다.
책들도 서점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것들뿐이었다. 피넛버터팔콘은 절반은 독립서점이고 절반은 그렇지 않지만, 책방에 가장 잘 보이게 진열된 책은 온통 독립출판으로 만들어진 책들뿐이었다. 책방의 성격이 어디에 있는지 매대에서부터 잘 드러나는 셈. 뿐만 아니라, 피넛버터팔콘은 독립서점 ‘스토리지북앤필름’에서 진행하는 ‘책방 멘토링’ 프로그램을 거쳐 시작한 서점이다. 무려 1호점 서점으로. 이걸 통해서도 확실한 사실 하나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서점 피넛버터팔콘의 뿌리 중 대부분은 독립서점에 있다는 걸.
그래서인지 책방에는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책들이 많았다. 독립서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하고 재미있는 책들. 겉면에 제목이 없는 책들은 물론이거니와 작가의 손맛이 듬뿍 묻어나는 그림책을 비롯해, <드립의 정석>, <갈굼의 미학> 같은, 개성이 절로 흘러넘치는 책들도 있었다. 이건 매번 글마다 적는 거 같은데, 독립출판 책은 확실히 보는 재미가 있다. 서점에서 흔히 마주치는 책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포근한 듯 독특한 서점의 분위기는 서점의 이름에도 그대로 녹아 있었다. 흔치 않은 이름, ‘피넛버터팔콘’. 혹시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기도 할 것이다. 맞다. 2021년에 개봉했던 바로 그 영화. 책방의 이름은 그 영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피넛버터팔콘>, 막간 설명
: 영화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레슬러의 꿈을 가진 ‘잭’이 보호소에서 도망 나온 후 어부 ‘타일러’의 도움을 받아 평생 만나고 싶었던 레슬링 영웅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다. 도보로 걷고, 뗏목을 타며 레슬러 학교까지 향하는 로드무비라고나 할까.
책방지기님은 피넛버터팔콘 영화를 보고서 즉흥적으로 책방 이름을 결정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타일러는 잭과 함께 레슬러 영웅을 만나러 가던 중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을 타는데, 책방지기님은 그 장면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고 한다. 꿈으로 향하는 과정 중에 타고 가는 뗏목에서 문득 책방이 겹쳐 보였다고. 책방이 그 뗏목과 같았으면,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꿈을 이루는 길목에서 잠시 포근하고 안락하게 몸을 실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책방의 로고도 ‘땅콩이 책 뗏목을 저어 나아가는 모습’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참고로 책방의 또 다른 로고는 뱁새만큼 귀엽게 생긴 매다.)
책방지기님은 즉흥적으로 이름을 결정했다고 했지만, 난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쩐지 즉흥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든 즉흥적인 결정은 절대 즉흥적이지 않다. 단지 즉흥이라 느끼는 것뿐, 난 책방지기님의 작명도 그런 두툼한 마음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방을 아끼고 방문객들이 공간을 충분히 즐겼으면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피넛버터팔콘’이라는 이름을 정하게 만든 것 아닐까.
책방지기님을 덮어놓고 칭찬하려는 건 아니다. 실제로도 책방지기님은 책방을 위해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책방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그 증거다. 필사와 독서, 글짓기 모임은 물론이고, 술모임(술 마시고 글을 쓰는 모임), 빵모임(빵 관련 책을 쓰신 작가님께서 주관하는 빵 먹기 모임, 단순히 빵만 먹는 건 아니고 맛과 생김새 등을 평가하는 등 꽤 전문적이다.) 등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굴러가고 있다.
그중에서 유독 ‘뗏목’이라는 책방의 이름과 잘 어울리는 프로그램이 있어 소개해 본다. 이름하여 ‘248 펜팔클럽’. 맞다. 우리가 아는 그 펜팔. 하지만 해외에 있는 친구랑 하는 건 아니고, 국내에 있는 타인과 편지를 주고받는 프로그램이다. 펜팔은 완도에 있는 ‘완도살롱’ 책방과 광교의 ‘피넛버터팔콘’ 책방이 둘 다 24-8번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두 책방의 책방지기님은 이 엄청난 우연의 일치를 쉽게 흘려보내기 힘들었고, 결국 ‘248 펜팔클럽’을 결성했다. 수원과 완도 사람들은 그렇게 연결되었다. 몇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뚫고서.
펜팔에 참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온라인(인스타그램)에서 펜팔클럽에 가입하고, 펜팔키트를 받은 후 정해진 날짜에 맞게 편지를 책방에 설치된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 그리고 답신을 며칠간 기다렸다 책방에 도착하는 편지를 받아오면 끝. 책방을 통해서 편지가 오가니 주소를 공개할 필요도 없어서 타인에게 자신을 노출시킬 위험도 적고, 신상을 절대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도 있어서 완벽한 미지의 인물과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재미도 있다. (단지 각 책방의 책방지기님께서 좀 수고를 하신다는 것뿐. 마치 뗏목을 젓는 뱃사공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편지가 오가는 책방이라니. 일단 표현부터가 정말 낭만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책방의 낭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책방의 본격적인 낭만을 담당하는 건 피아노다. 피넛버터팔콘의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원목 피아노. 피아노가 있는 책방. 이름부터 벌써 낭만 그 자체다. 서점의 피아노는 당연히 인테리어용이 아니며, 실제로도 종종 연주되는 악기다. 그래서인지 책방에서는 가끔 버스킹이 열린다. 내가 방문했던 날에도 책방지기님은 버스킹이 곧 또 한 번 열릴 예정이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책방지기님도 함께 연주에 참여하는 작은 음악회라고.
어둠이 드리워진 늦은 저녁, 책이 가득한 공간에 몰려든 사람들, 손에 한 잔씩 들려 있는 음료. 그들을 감싸는 따뜻한 노란 조명. 그 한가운데서 열리는 피아노 연주회, 그리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책방지기. 이게 낭만이 아니면 뭐겠는가.
책방지기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이 분은 삶을 정말 제대로 즐기며 사는 분이구나, 라고. 인스타그램의 글에서 전해졌던 범상치 않은 매력은, 매 순간에 흠뻑 빠져들어 온전히 녹아드는 이 분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라고. 글이 매력적인 건 사람이 매력적이기 때문이었다. 낭중지추라고, 타고난 매력은 어떻게든 숨겨지지 않는가 보다.
그러니 책방 피넛버터팔콘에 가면 책방지기님을 한 번 만나보길 바란다. 활달하고 말씀도 잘하시니 분명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단, 책방지기님을 만나고 싶다면 먼저 영업시간을 확인하고 가야 한다. 최근 들어 책방이 ‘무인 책방’으로도 자주 운영되기 때문. 책방지기님의 삶에 이런저런 일이 펼쳐지면서 결정한 일이라고 한다. (무인 책방은 책방 문은 열려 있되, 책방지기님은 없는 운영 방식이다. 요즘 들어 책방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편.)
공간 자체도 포근하고, 볼 책도 많아서 책방만 구경해도 상관없긴 하지만, 꼭 책방지기님을 만나야겠다 하면 인스타그램 공지를 미리 확인하고 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들른 김에 피드를 훑어보며,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글도 읽어 보고. 책방에서 운영하는 행사들도 한 번씩 둘러보고. 재밌어 보인다면 참여도 해 보시라. 책방지기님께서 회원 모으기에 열과 성을 다하는 중이니 참여해서 재미가 없진 않을 거다. (맞다. 막간을 이용한 책방 홍보 중이다.)
책방에 있었던 시간은 살갑고 흥겨웠다. 그날따라 유독 책방의 방문객이 많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던지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여태 방문했던 책방 중에 가장 활기가 넘쳤다고 표현할 수 있었을 만큼, 그날의 책방은 오가는 사람들과 말소리로 가득했다. 물론, 84%의 참된 내향인, 대문자 I인지라, 내적 흥을 겉으로 마음껏 표출하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오랜만에 두둠칫 신이 났다. 나룻배를 타고 뱃놀이를 하듯, 잠시 일상에서 탈출한 기분이었다. 제 이름에 너무 잘 맞는 분위기를 가진 책방. 또 다른 재미난 서점을 알게 되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추신 : 방문 당일, 서점에 책을 입고한 작가님들 몇 분이 와 계셨다. 그래서 덧붙임으로 당일 만났던 작가님들의 책을 첨부한다. 세 분 모두 재미난 분이니 책도 그분들만큼 재밌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