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의 책을 팔아 티베트 난민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만듭니다. 록빠가 운영하는 헌책방, 사직동 그 가게 나주에서
나주는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 같은 장소였다. 올 초, 책 원고 작성을 마친 후, 휴식처럼 하루 이틀 머무르려 했었지만, 여러 일들이 겹치고 쌓여 결국 처음 마음먹은 지 몇 개월이나 흐른 후에야 기차표를 알아보게 되었다. 봄이었던 계절은 어느새 가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한창 책방 여행을 다니고 있었고, 책방의 재미를 이제 막 알아가던 중이었다. 그래서 여행 계획을 써 내려가던 나는, 장난삼아 지도에 ‘서점’을 쳐 보았다.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나주에는 서점이 있었다. 있긴 했다. 그것도 꽤 여러 곳이었다. 번화한 도심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책방은 단 한 곳뿐이었다. 서점보다 ‘책방’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곳. 책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동네에 숨겨진 조그마한 문화 공간. 그런 곳을 그리며 검색 목록에 뜬 책방을 하나둘 제하고 나니, 결국 단 한 곳만이 남게 되었다.
바로 오늘 소개할 책방, ‘사직동, 그 가게 나주에서’다. 이름이 꽤 길고 복잡하지만, 책방의 이름은 서점을 소개하는 가장 간결한 표현이다. 책방에는 이름의 길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시간과 역사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책방을 간단히 검색하다, 공간을 뒷받침하는 역사를 알게 된 순간, 나주는 간절한 곳이 되었다. 단순히 휴식을 위해 가는 여행지가 아닌, ‘반드시 가야 할’ 의무의 장소로 변해 버렸다. 처음 세웠던 여행 계획은 결국 책방을 위해 새로 쓰였다.
‘사직동, 그 가게 나주에서’는 책방 이상의 공간이다. 헌책방을 비롯해 카페, 수공예품 판매를 겸하기도 하지만, 그건 공간의 기능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사직동, 그 가게 나주에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책방이나 카페, 수공예품 가게가 아닌, ‘록빠가 세 번째로 선보인 가게’라는 표현이다. ‘사직동, 그 가게 나주에서’를 운영하는 주체는 개인이 아닌, ‘록빠’라는 단체이기 때문이다.
록빠(ROGPA)는 티베트어로 ‘친구, 도움을 주는 이’라는 뜻으로, 티베트 난민을 위해 세워진 비영리 민간단체(NGO)다. 2004년, 티베트 난민 거주 구역인 ‘인도 다람샬라’에 설립된 록빠는 티베트 난민의 사회의 문화적, 경제적 자립을 위해 활동한다. 록빠는 ‘아래로부터의 자립’을 주된 목표로 삼는다. 단순히 금전적, 물질적, 인적 후원만으로 그치는 자선 활동이 아닌, 티베트 난민들의 자주적인 생활과 문화 보존을 위해 다방면으로 힘쓰고 있다. 록빠의 활동 중 많은 부분에 티베트 난민들이 참여하고 있는 이유다.
록빠는 세 가지 주요 활동을 전면에 내세워 진행한다. 첫째는 티베트 난민촌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한 영유아 교육 지원 사업 및 탁아소 지원, 둘째는 어머니와 여성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작업장 및 가게 운영, 셋째는 티베트 난민 어린이들의 문화와 언어 교육을 위한 티베트어 동화책 출판과 어린이도서관 설립이다. 이 외에도 티베트 문화를 보존하고 알리기 위한 록빠 페스티벌을 비롯한 여러 행사들을 열기도 한다. 그리고 ‘사직동, 그 가게 나주에서’는 록빠의 세 가지 굵직한 활동 중 둘째와 셋째 활동, ‘티베트 여성들의 노동’과 ‘티베트 난민 아동을 위한 어린이책 제작 및 보급, 도서관 건설’에 깊이 관여한다. 가게에서 티베트 여성이 만든 수공예품을 판매하고, 책방의 수익금으로 티베트 아동을 위한 책을 만들고, 도서관을 짓는 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 ‘티베트 난민’ 이해를 위한 막간 상식 ˙
티베트인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지닌 민족으로, 히말라야 산맥의 티베트 고원(약 해발 4000-5000m)에 국가를 세우고, 터전을 일구며 살아왔다. 하지만 1950년 침략 이후 중국 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며 정치적, 종교적 탄압을 견디다 못한 많은 티베트인들이 인도로 망명했고,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인도 다람샬라 지역에 국가 회복을 위한 임시 자치 정부와 난민 사회를 꾸렸다. 나라를 잃은 지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국가와 영토 수복을 위한 비폭력 투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망명국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티베트에 가 보지 못한 2세와 3세들이 늘어나며 티베트 문화와 언어의 명맥과 사회의 결속력은 점차 약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직동, 그 가게 나주에서’는 록빠가 처음으로 세운 가게는 아니다. 록빠는 자체적인 단체 운영과 재정 지원을 위해 총 세 차례 가게를 운영한 바 있다. 첫 번째 가게는 2008년 인도 다람샬라에 문을 열었던 ‘ROGPA shop & café’고, 두 번째 가게는 2010년 한국의 서울, 서촌에 있는 ‘사직동, 그 가게’다. (두 번째 가게는 현재도 운영 중이다. 카레와 짜이 맛집이어서 이름을 들어본 분들이 꽤 있을 거다.) 그리고 2021년 문을 연 세 번째 가게, 나주 영산포에 있는 ‘사직동, 그 가게 나주에서’가 있다.
세 번째 가게는 앞선 두 가게와 비슷한 듯 다르다. 첫 번째 가게에서는 수공예품과 의복 등의 물품을 파는 가게와 카페를 운영했고, 두 번째 가게에서는 식당(카레)과 수공예품 판매를 겸했다면, 세 번째 가게에서는 카페와 수공예품 판매 그리고 ‘헌책방’을 함께 한다. ‘그 가게, 작은 책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직동, 그가게 나주에서’의 샵인샵 헌책방. 내가 앞에 두 가게를 제쳐 두고 세 번째 가게부터 찾을 수밖에 없던 이유다. 수익금 전액이 NGO 운영에 사용되고, 버려질 위기에 처한 중고 책들에게 두 번째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책방이라니. 이런 서점을 한달음에 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는가.
그렇게 도착한 책방, 문을 열자마자 제일 처음 맞아주신 건 ‘빼마’님이다. 티베트어로 ‘연꽃’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빼마님은 록빠의 공동 설립자이자 나주 영산포 책방의 책방지기이기도 하다. (참고로 빼마님은 한국인이며, 록빠의 또 다른 공동 설립자 남편 ‘잠양’ 분은 티베트인이다.) 여름과 겨울은 한국에서, 봄과 가을은 티베트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빼마님은 정말 운이 좋게도 내가 방문한 날 아직 한국에 계셨고, 마침 책방에 머물러 계셨다. 작은 탁자에 둘러앉은 단골 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다 문이 열리는 종소리를 듣고서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책방에 들어선 내게 책방지기 빼마님은 따뜻한 차와 햇배를 내 주셨다.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나무 소반 위에 담긴 정갈한 차와 과일. 책방에 들르면 허브차를 주문하고, 짜이도 맛봐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먼저 차를 내주시다니, 그것도 이렇게 예쁜 그릇에. 감동 가득한 마음을 가득 안고서 유리 주전자에 담긴 차를 찻잔에 따라 마셨다. 티베트인의 감기 예방을 위해 현지에서도 보급한다는 차는 때마침 쌀쌀해진 날씨에 정말 잘 어울리는 음료였다. 여러 종류의 허브에서 우러난 쌉싸름한 향긋함과 생강의 은은하고도 알싸한 매콤함, 그리고 갓 수확한 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달콤함을 맛보며 참 호사스러운 손님상을 받았구나, 생각했다.
이후 빼마님과 함께 걸음을 옮긴 한 책장 앞, 그곳에는 티베트어 그림책들이 꽂혀 있었다. 록빠에서 티베트 아이들을 위해 출간한 예닐곱 권의 책들. 전래동화와 번역 동화는 물론, 티베트인 작가가 쓰고, 한국인이 그림을 그린 창작 동화책 등, 책의 종류와 장르는 다양했다. 빼마님은 책을 한 권 한 권 펼쳐 보이며 각각의 책들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아래는 그날 들었던 그림책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일곱 권 남짓한 그림책은 각각의 충실한 배경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해서 분량이 좀 길어지더라도 모든 책의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단, 여기서 ‘이야기’란 책의 내용이 아닌, 책의 저자와 출간 경위 등의 배경 설명이다. 책 안에 담긴 진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책방을 직접 방문하시길 추천한다. 티베트어라 내용을 전부 읽을 수는 없어도, 표지에 적힌 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읽을 수 있고,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조금은 낯선 모습의 글과 그림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테니 말이다.
< 록빠에서 출간한 그림책 >
록빠에서 출간한 그림책은 전부 하드 커버로 제작된다고 한다. 티베트 난민촌에는 아이들이 볼 만 한 양질의 어린이책이 거의 없으며 그마저도 얇고 흐물거리는 종이들뿐이라, 동화책을 만들 때만큼은 견고한 고급지로 제작하고 싶으셨다고.
그리고 아래 목록에 정리된 책들은 위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지까지 촬영하진 못했지만, 표지와 간단한 설명은 영상 안에 담아 놓았다. 대부분 그림책이라서 표지만 봐도 보는 재미가 있다.
1. 송첸감뽀 왕과 코끼리 (2022년 출간)
: 티베트의 전래동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림책이다. 가장 최근 출간된 책이자 록빠에서 제작한 첫 전래동화책이다. 책에 수록된 그림은 티베트인 예술가가 그리고 제작했다.
2. 돌마와 강아지 (2019년 출간)
: ‘제1회 티베트어 동화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네 편의 동화 중 첫 번째로 제작된 책이다. (제1회 티베트어 동화 공모전은 티베트인 동화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개최한 대회이다.) 티베트인 작가 ‘캘상 돈둡’이 글을 쓰고, 한국인 동화 작가 ‘김진화’가 그림을 그린, 한국과 티베트의 합작 동화책이다.
3. 눈표범 (2017년 출간)
: ‘발행인 프로젝트’의 후원금으로 출간된 어린이책이다. 영국 동화 작가의 동화의 판권을 록빠에서 직접 구매한 후, 티베트어로 번역해 출판했다. (티베트에는 자국의 동화 작가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여 외국에서 판권을 사들여 왔다고 한다.) 티베트 자연을 배경으로 한 그림책으로, 티베트인 아이들에게 티베트의 환경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출간되었다고 한다.
4. 티베트 동물 (2015년 출간)
: ‘발행인 프로젝트’의 후원금으로 출간된 어린이책이다. 티베트 고원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모습을 담았다. 티베트에 한 번도 방문해 보지 못한 티베트 난민 아이들에게 모국의 자연환경을 알려주기 위해 제작되었다. 보드북이라서 모든 페이지가 두껍고 단단하며, 동물의 그림과 이름이 함께 있어 자연물 단어 학습에도 좋은 책이다.
5. 나는 따시입니다 (2013년 출간)
: ‘발행인 프로젝트’의 후원금으로 출간된 어린이책이다. 티베트에 사는 아홉 살 소년 ‘따시’의 이야기를 담았다. 티베트에 가 보지 못한 티베트인 아이들에게 티베트에서의 삶을 알려주기 위해 제작되었다. 책에 수록된 그림은 티베트인 그림 작가가 그렸다고 한다.
6. 까카북 (2013년 출간)
: ‘발행인 프로젝트’의 후원금으로 출간된 첫 번째 어린이책이다. 티베트어 알파벳을 배우고 익히는 교습 책으로, 티베트어 알파벳에 해당하는 30개의 글자와 글자를 사용한 단어, 각 단어에 해당하는 그림을 수록했다. 초판은 소프트 커버로 출간되었으며, 다음 판부터는 하드 커버로 출간되었다.
7. 그 외 : Benny’s Secret
그림책을 한 권씩 살펴본 후, 가게 안쪽에 있는 헌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직동, 그 가게 나주에서’는 두 공간으로 나뉜다. 전면 공간에는 카페와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으며, 계산대 뒤에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 작은 방에서는 헌책방을 운영한다. 두 공간은 다른 분위기로 푸근하다. 카페와 수공예품 가게는 햇살이 깊이 스며들어 따뜻하고 밝으며, 이국적인 티베트 소품들과 한국의 고가구들, 티베트에 대한 설명과 사진들까지 다양한 볼거리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게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을 거치면, ‘작은 책방’이라는 팻말이 걸린 세 평 남짓한 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헌책방은 가게 뒤에 딸린 작은 방을 개조해 만든 곳이다. 두툼한 디딤돌을 딛고 올라서야지만 들어설 수 있는 곳. 세로로 기대어 서 있는 정겨운 고무신 몇 켤레를 지나 안쪽으로 발을 디디면, 따듯한 구들장이 발밑에서 느껴진다. 카페보다 빛이 적어 어둑하고, 책장 안에 미처 자리를 찾지 못한 책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지만, 혼란한 듯 질서정연한 그곳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하고 고요해진다. 푹신한 좌식 방석과 정강이 높이도 되지 않는 조그만 책상, 금방이라도 머리에 닿을 것처럼 낮게 드리워진 얇은 천과 두어 개의 램프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 사방에서 몸을 감싸주는 듯한 골방의 편안한 분위기에 가만히 잠겨 들게 된다. 그렇다. 이곳은 책을 읽기 정말 적당한 곳이다. (그래서 촬영만 아니면 정말 내도록 그곳에 처박혀 책을 읽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기차 시간이 허락해 주질 않아 발에 땀 나도록 책방 안을 뽈뽈거리고 돌아다니기만 했다. 하지만 혹시 책방에 방문하거든 헌책방에 꼭 들어가 그곳의 분위기를 즐겨 보시라.)
‘그 가게, 작은 책방’의 한 벽면 가득 쌓인 책들은 모두 기부받은 것들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국 팔도에서 모인 책들은 전국 팔도에 거주하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했다. 책의 수와 종류가 이토록 방대한 데는 책방의 인기도 한몫했다. 책방이 나주에 문을 연 지 한 해가 채 되기도 전에 전국에서 2000권의 책들이 모여들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새로운 품에 전해졌다. 그만큼 분주하게 책이 들어오고 또 판매되는 서점이라는 것이다.
책방 인기 비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책방이 목표로 하는 바가 크게 관여하지 않았을까 한다. 책방의 수익금은 운영비를 제하고 전부 티베트 어린이책 제작과 어린이도서관 건립을 위해 쓰이고 있다. 책방의 선한 목표는 분명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을 테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오늘 보낸 책이 내일 그들이 볼 책으로 탈바꿈하고, 새로 구매한 책 한 권이 티베트 어린이들을 위해 짓는 도서관의 벽돌 한 장이 될 테니까. 일석이조를 이루겠다는 좋은 마음에서 책을 기부하고 또 한 권씩 구매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지 않는 책을 처리하며, 읽고 싶었던 책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구매하며 좋은 일도 함께하는 거니까.
그렇게 몇 차례의 기부와 판매를 성황리에 마친 책방은, 최근 다시 헌책을 기부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전에 기부받은 책들이 하나둘씩 주인을 찾기 시작하며 재개한 일이다. 더 이상 보지 않는 책을 보내기만 하면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생소하지만 참신한 기부 방법. 중고 서점에 미처 팔지 못한 책을 보유하고 있거나,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목격하며 ‘기부’ 자체를 주저하는 이들에게 슬며시 ‘작은 책방’의 헌책 기부를 추천해 본다. 잘 보지 않거나 쓸모가 다한 책들을 책방에 택배로 보내기만 하면 되는 쉬운 기부이니, 관심 있는 분은 아래 링크를 한 번 들려보길 바란다.
물론, 나도 책방에 책을 기부했다. 이미 책방에 가기 전에 책을 기부받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집에서부터 책을 몇 권 챙겨서 들고 갔다. 책방지기님은 책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셨다. 책이 너무 낡아서, 그리고 유명하지 않아서 혹여 받아주시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했던 나는, 그 환한 얼굴을 보며 안심했다. 좋은 일을 했다는 소소한 뿌듯함은 덤이었다.
그리고 사실 숨겨진 기쁨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책방에 ‘내 책’을 기부했다는 사실이다. 내 책 기부는 계획한 일이 아니었다. 책방지기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우연히 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마침 나는 가방에 내 책이 한 권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책방 여행을 갈 때면 늘 내 책을 가방에 한 권씩 넣고 다닌다. 인증샷 등등의 이유로 책이 필요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책도 기부해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책방지기님은 흔쾌히 ‘괜찮다’고 답하셨다. 뭔가 손 안 대고 코 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지도 않은 책으로 생색을 낸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아무튼 내 책을 책방에 전하며 난 묘한 뿌듯함을 한 번 더 느꼈다.
책방을 한참 둘러본 후, 나는 짜이를 한 잔 주문했다. ‘사직동, 그 가게 나주에서’의 카페에서는 커피 대신 생소한 이름의 차를 판매한다. 티베트 난민촌에서 시작한 록빠의 카페는 록빠의 자원 활동가들이 인도 여행길에서 마시던 짜이를 대표 메뉴로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카페의 메뉴에도 짜이를 비롯해 어디서 흔히 볼 수 없는 이름들이 적혀 있다. 하지만 여러 메뉴 중 카페가 자신 있게 추천하는 메뉴는 단연 ‘짜이’다. 가게 밖 유리창과 간판에까지 ‘짜이’가 커다랗게 적혀 있으니,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 추천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짜이는 인도에서 마시는 밀크티의 일종으로, 홍차와 향신료, 우유를 섞어 만든 차다. 여기서 잠깐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오래전부터 ‘짜이’를 맛보고 싶었다. 어린 시절 <세 잔의 차>라는 책을 읽으며 처음 ‘짜이’라는 차를 알게 되었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 책의 내용은 전부 잊어버렸지만, 책에 등장했던 ‘짜이’라는 말은 내 안에 깊이 남았다. 히말라야 지역에서 물처럼 마신다는 차. 하루에 세 번 따뜻하게 홀짝이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민을 날려버린다는 신기한 차. 어린아이의 눈으로 읽었던 ‘짜이’에 대한 설명은 낯설지만 매력적이었다. 십 년이 훌쩍 넘도록 잊지 못할 만큼. 하지만 짜이는 국내에서 맛볼 수 있는 곳이 흔치 않은 희귀한 음료였기에, 난 오래도록 짜이라는 숙제를 마음속 ‘궁금증 창고’에 간직해 두기만 했다.
다행히 나의 케케묵은 궁금증은 나주 영산포의 한 책방에서 드디어 풀릴 기회를 얻었다. 짜이를 주문한 후, 난 차가 우러나는 시간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마침내 마주한 짜이. 금속과 뜨개로 만든 귀여운 컵홀더에 쌓인, 작은 유리컵에 담긴 옅은 갈색의 음료. 따뜻한 수증기를 타고 은은한 이국적인 향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맛본 짜이는 생소하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고소하고 깊은 맛과 달콤하고 쌉싸름한 풍미가 순차적으로 흘러들어왔다. 아래는 그날 경험했던 짜이의 맛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아주 주관적인 평이니 본인이 짜이 고수다 싶은 분은 아래 설명을 넘기길 바란다. (자칫 가소로울 수 있으니) 하지만 짜이가 무엇인지 이 글을 읽으며 처음 알았거나, 짜이가 뭔지는 알지만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분에게는 아래 내용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짜이를 처음 경험한 사람이 쓴 글이니, 아무래도 짜이에 대한 경험이 없는 분께 좀 더 와닿는 설명이 되지 않겠는가.
˙ 짜이 초심자의 짜이 맛 묘사˙
짜이의 첫맛에서는 샤프란(중동 지역 향신료)과 카레 맛이 느껴졌다. 노란 3분 카레가 아닌, 일본식 블록 카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하고 깊은 맛. (카레 외에 다른 표현법을 찾고 싶었으나, 카레만큼 찰떡인 묘사가 없어 부득이하게 카레를 가져왔다. 아마 향신료 중에 강황이나 카레에 들어가는 무언가가 섞여 있는 듯하다.) 찰나의 카레가 스쳐 가면 은근한 달콤함과 따뜻하고 부드러운 우유의 풍미가 느껴지고, 마지막에는 알싸하고 쌉싸름한 홍차가 깔끔하게 입을 정리한다. 이 세 가지 맛이 순차적으로 돌며 ‘짜이’ 한 잔을 이룬다. 개인적으로 샤프란 향도 좋아하고, 라테도 좋아하는 편이라 짜이를 편하게 즐겼다. 다만, 카페인이 잘 받지 않는 몸이라 홍차나 커피는 당연히 못 먹고, 녹차나 허브차도 가려 마시는 편이어서 후유증이 있을까 약간 두렵긴 했다. (카페인도 못 먹는데 왜 짜이에 도전했냐고 물으면, 궁금증이 다른 모든 걸 이겨냈다는 대답밖에 할 게 없다. 그만큼 궁금한 짜이였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런 부작용은 없었다. 보통 홍차는 두 모금만 마셔도 심장이 심하게 두근대는 편인데, 이상하게 짜이는 한 잔을 다 먹고도 큰 문제가 없었다. 당연히 잠도 잘 잤고, 속이 쓰리지도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다.
이번 책방은 무거운 손으로 나섰다. 책방에는 책 외에도 구경할 것들 천지였다. 티베트 여성 작업자들이 만든 수공예품들에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색적인 매력에 끌려 소장할 것과 선물할 것들을 하나둘씩 고르다 보니 어느새 양손 가득 물건들을 안고서 계산대로 향했다. 책 한 권과 몇 가지의 수공예품들. 전부 만족스러운 구매였다.
그렇게 하루 동안의 짧고도 굵었던 나주 여행이 끝났다. 계획했던 다른 곳들은 둘러볼 엄두도 내지 못했고, 급하게 먹은 곰탕 한 그릇과 돌아가는 길 만났던 택시 기사님의 예상치 못한 속성 가이드로 겨우 나주의 정취를 즐겼을 뿐이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날은 또 다른 여행과 충분히 맞바꿀 가치가 있는 하루였다. ‘사직동, 그 가게 나주에서’는 그만큼 색다른 시간을 선사하는 공간,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경험하게 해 주는 책방이었다.
나주는 앞으로도 더 가 볼 예정이다. 상상만으로 그렸던 그곳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았고, 평온했다. 다시 방문하고 싶을 만큼. 고즈넉하고 잔잔한 도시. 또 다른 날, 또 한 번 방문할 나주에서, 다시 만날 책방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그달 모나 Monah thed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