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하면 여긴 꼭 가 봐야 한다면서요?, 독립출판물과 아트북의 축제, 언리미티드 에디션 2023
언리미티드 에디션 서울 아트북페어 2023(UE2023). 독립출판 책과 아트북의 축제. 책의 출판사가 있든 없든, 1인 출판사이든 다인 출판사이든, 소규모든 대규모든 “전혀” 상관없는. 오로지 책에 대한 진심 하나로 형성된 모임.
UE2023(언리미티드 에디션 2023)을 반드시 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였다. 책이 존재의 이유를 자꾸만 상실해 가는 현재, 책의 물성을 직접 빚고 또 예찬하는 사람들이 한 데 모이는 곳은 그만큼 희귀하고도 소중했다.
올해 언리미티드 에디션 아트북페어 2023은 북서울미술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아침에 또 비가 왔다. 세상에 왜 어디를 갈 때마다 그렇게 비가 쏟아지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는 요즘이지만, 다행히 미술관 앞에 도착할 때쯤에는 비가 그쳤기 때문에 날씨 투정은 이만하련다.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흐린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낸 북서울미술관 보자 마음이 일렁였다. 수많은 사람과 부스가 늘어선 공간 속으로 카메라를 들고 가야 한다는 압박이 밀려왔다. 거대 대문자 I를 숙명처럼 짊어지고 다니는 나란 인간은, 아직도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에 적응 중이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들어간 북서울미술관 안, 난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꽤 놀랐다. 넓은 행사장이 예상보다 훨씬 고요해서였다.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도서전이나 북페어는 거대한 소음의 소용돌이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UE 2023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산발적인 소음은 있었지만, 건물 자체에 방음과 흡음이 잘 되는지 소리가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소음에 예민한 편이라 필요 이상의 소리가 없다는 건 꽤 다행이었다.
적어도 한 가지의 부담은 적어졌다. 좋은 징조였다.
가장 먼저 2층으로 향했다. 내 의지는 아니고, 행사장 안내원들의 지시였다. 내가 도착할 당시 1층에는 사람이 많았던지라 그들은 2층부터 관람하기를 권고했고, 말 잘 듣는 일개 시민인 나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몸을 실었다.
2층에 도착하자 UE 2023 북페어의 주요 행사들이 이루어지는 ‘프로그램 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연과 북토크가 진행되고, ‘모두의 프로그램’ 코너가 있으며, 방명록을 남길 수 있는 커다란 복합 공간. 프로그램 룸에 들어설 때쯤에는 한 북토크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난 한 귀로 틈틈이 강연을 엿들으며, ‘모두의 프로그램’ 코너를 둘러보았다.
‘모두의 프로그램’은 북페어에 참여한 부스들을 소개하는 초소형 홍보 공간으로, 각 부스를 대표하는 굿즈나 명함, 책자들이 전시된 곳이다. 실제 부스들을 만나기 전, 예고편처럼 전체 부스의 특징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유익한 곳이랄까. 각 부스만의 특색있고, 개성 넘치는 디자인 굿즈들을 보는 맛은 상당했다. 똑같은 한 뼘짜리 공간인데도 어떻게 단 하나도 같은 부스가 없는지. 명함, 스티커, 엽서, 미니북 등 엇비슷한 카테고리 속에서도 제작자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독립출판물의 정수는 이러한 ‘다름, 다양성’ 그리고 다채로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진입한 중앙 행사장 안. UE 2023는 방음도 잘 되고, 질서정연한 북페어이긴 했지만, 그래도 북페어는 북페어였다. 무시 못 할 정도의 어마무시한 수의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있어 인간의 틈바구니를 뚫고 지나다니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특히나 개별 부스가 두세 사람만 서 있어도 꽉 차는 크기라 촬영이 정말 쉽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한 촬영본 대부분이 ‘어깨너머샷’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든 장면에는 사람들이 걸리고 또 잡혔다.
여러 극복할 점이 많았긴 했지만, 그래도 북페어는 여전히 북페어였다. UE 2023은 특히 독립출판물과 아트북을 함께 다루는 행사여서 읽을 것만큼 ‘볼 것’이 정말 많았다. 줄글보다 시각적인 부분에 더 큰 비중을 둔 아트북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부스마다 구경할 것들 천지였다. 북페어라기에는 그림들이 워낙 많아서, 북페어보다는 오히려 일러스트레이션페어와 북페어 중간 정도 되는 행사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일레스트레이션만 전문으로 하는 작가님들도 꽤 보였다.)
비교적 낯선 북페어에서 익숙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반가운 책들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지난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책방을 다닌 결과였을까, 곳곳에 제법 아는 책들이 보였다. 인디펍 홈페이지 메인에서 매일같이 봤던 ‘나의 이상하고 사랑하는 얼굴(<warm gray and blue>)’, 알라딘 북펀딩에서 눈여겨 봤었던 ‘마녀의 정원(<엣눈북스>)’, 읽는 내내 문체가 정말 좋았던 ‘이토록 작은 세계로도(<북다마스>)’, 서울국제도서전(SIBF)에서 보았던 한국의 아름다운 책 ‘토끼전(<썸북스>)’, 안리타 작가님의 에세이집 시리즈 (<리타의 테이블>) 등, 듬성듬성 나열해도 벌써 여러 권이었다. (지금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지나가다 ‘어 저 책!’ 했던 것들도 있었다.) 그 외에도 <이후북스>, <별책부록>, <헬로인디북스>, <고스트북스>, <더폴락>, <유어마인드> 등, 이름이 알려진 서점 부스들은 웬만하면 알아볼 수 있었다.
새삼 나 자신이 독립출판물과 독립서점에 물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위에 나열한 것들은 독립출판 및 독립서점들 중 ‘많이 알려진 유명한 책과 공간’ 중 일부에 불과해서 이 세계를 깊이 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지난번 국제도서전(SIBF)에서 헤메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는 걸 느낀다. 내년에는 아마 이번보다 조금 더 많이 알게 되겠지. 고작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면, 해를 거듭한 후에는 얼마나 더 많은 걸 볼 수 있을까, 내심 궁금해졌다.
북페어의 무수한 인파와 대비되는 낭독회 현장. 난 역시 소규모, 소인원 그룹이 잘 맞는 체질이다.
우연히 마주친 기분 좋은 행사도 있었다. 저자가 직접 자신의 책을 읽는 ‘잠깐 낭독회’. 5분 동안만 진행되는 짧은 낭독이었지만, 난 그 5분이 다른 거창한 행사, 북토크나 강연보다 좋았다. 아마도 계단 밑에서 이루어지는 골방처럼 아늑한 무대가 안겨 주는 느낌 때문이었으리라. 낭독자는 단순히 책을 읽고, 관객은 듣기만 하는 게 전부였지만, 책을 매개로 소통하는 느낌이었다. 서로 숨 쉬는 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낭독회에서는 서로 눈만 마주쳐도 소리 없는 대화가 이루어졌다. ‘북페어’라는 거대한 행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고 이질적인 무대에서, 난 어쩐지 여태 필요했던 무언가가 충족된 느낌이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잠시나마 ‘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달까. 작은 무대만이 낼 수 있는 저력을 제대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이번 UE 2023에서는 외국 부스도 꽤 눈에 띄었다. 일본, 대만, 중국, 미국, 독일 등, 각국의 다양한 독립출판과 디자인, 아트북을 만드는 많은 제작자들이 곳곳에서 자신의 창작물을 선보이고 있었다. 다양한 국가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한다는 건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타국 제작자들의 부스를 만날 때마다 매번 놀랐다. 그들의 우수한 창작물과 먼 타국까지 온 열정에 한 번 놀랐고, 그들이 잠시 떠나온 국가들의 수가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데서 다시 한번 놀랐다. 음악에서도 인디가 하나의 거대한 장르이듯이, 독립출판이라는 영역 역시 생각보다 넓고,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여 있었다. 내가 여태 알았던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마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지만) 정말 얼마나 더 알아야 할지. 독립출판이란 정말 끝이 없는 세계다.
행사를 한 바퀴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행사장을 훑었다. 몇 가지 점찍어 두었던 책들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고른 책은 3권. 프란츠 출판사의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에디시옹 장물랭 출판사의 <새내기 유령>, 그리고 엣눈북스 출판사의 <마녀의 정원>이다. (책의 세부 내용은 추후 서평으로 올릴 테니 궁금하면 서평에 놀러와 주길 바란다.)
써 놓고 보니 세 권 다 비교적 시스템이 갖추어진 출판사 책이네. 북페어까지 간 원래 목적은 개인 제작자의 책, 온전한 독립출간물을 구매하려는 것이었는데(겸사겸사 작가님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본래 목적과는 상당히 상반된 결과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예상치 못한 지점이 있다. 이번 행사를 다녀오며 독립출판 제작자들이 카메라에 상당히 불편감을 느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은 북페어들을 많이 다니지 않았다 보니,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간 적은 이번이 처음이니, 이게 UE 행사만의 독특한 특성인지 혹은 독립출판 행사 전반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으나. UE 2023 행사를 촬영하는 내내 꽤나 눈칫밥을 먹었다. 타 행사에 비해 카메라를 보는 눈이 다들 곱지 않았달까..
촬영에 대한 경계심은 사실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아트북과 디자인, 일러스트’를 주력하는 부스가 많다 보니, 아무래도 책이 영상에 노출되고, 기록되어 인터넷상에 퍼지는 게 껄끄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걸 인지한 터라 일부러 부스 전반만 촬영하고, 최대한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노력한 부분도 있다. (그래서 아마 어깨너머 샷이 많이 나온 걸지도..) 혹여 책 내지를 정말 촬영하고 싶은 경우에는 꼭 촬영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내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카메라를 보는 대부분 부스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책을 촬영해도 괜찮을지 허락을 구하면 어김없이 떨떠름한 표정과 ‘예, 뭐.. 하세요.’라는 뜨뜻미지근한 대답이 돌아왔다. 같은 패턴은 그 후에도 몇 번 반복되었고, 그때 알았다. 이곳에는 카메라를 가져오면 안 되며, 다들 영상에 노출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는 사실을.
사진 찍는 것이 허용된 공간이라 당연히 영상 촬영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건 나만의 비약이었나보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런 작은 행사들은 웬만하면 카메라 없이 가려고 한다. 그렇다고 안 가겠다는 건 아니다. 재밌는 거 많고, 즐길 거 많으며, 볼 거 많은 데를 왜 포기하겠는가. 그냥 몰래몰래 갈 거다. 아무도 모르게. (그렇다고 누가 관심 가져줄 것도 아니지만.) 하지만 오히려 홀가분하다. 사람 많은 곳에 카메라 들고 가는 건 내 입장에서도 부담이었으니까. 이렇게 된 편이 서로에게 좋은 것 아닐까.
독립출판물의 축제는 내년에도 계속될 예정이다. 그때는 또 얼마나 색다른 모습일까, 그리고 그곳을 바라보는 내 눈은 얼마나 더 성장해 있을까.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분명 더 많이 아는 모습이리라. 내년의 내가 얼마나 달라질지, 내심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