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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Nov 25. 2023

아내를 죽이고 태어난 딸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언리미티드에디션 2023’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언리미티드 에디션 2023’에서 우연히 만난


시미언 피즈 체니
: 왜냐하면 정원이란 얼굴이거든!
  그저 꽃을 심은 화단이 아니야. (...)
  정원은 늙지 않는 신비로운 얼굴이란다.
  오, 심지어 나날이 젊어지는 경이로운 얼굴이야.
  나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미궁에 빠져 있단다.
  이곳의 모든 정수를 지키고, 이곳의 색깔들을 다채롭게 늘리고,
  이곳의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며 살아가는 온갖 새의 노랫소리를 기보하기 시작했단다.

로즈먼드  
: 저는 존재하지 않는군요. 제 마음이 아프네요.     

-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중 발췌


로맨스 소설이 아닙니다. 제목과 표지에서 오는 따뜻함에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책은 절절한 괴팍함이 모든 페이지에서 배어 나오는, 뒤틀린 사랑의 장송곡입니다. 정원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정원은 단지 이름만 도용되었을 뿐이죠. 아니, 어쩌면 정원의 위대함과 영속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인간의 삶이 이용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책은 표면상으로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공회 신부인 ‘시미언 피즈 체니’가 해산 중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딸을 자꾸만 밀어내고, 딸 로즈먼드는 그런 아버지의 반경 안에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애를 쓰다 정신착란에까지 시달리죠. 아버지의 냉혹한 태도에 뿌리까지 바싹 말라가면서요. 하지만 아버지는 딸을 보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내가 남긴 유산인 “정원”에만 골몰하죠. 정원 가위조차 들 힘이 없는 나이까지, 신부는 오로지 그곳에만 머무릅니다.      


그런 냉정함이 죄가 된 것일까요, 체니 신부의 삶에는 점차 정원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는 정원에 있는 시간을 음악으로 기보합니다. 새들의 노랫소리, 스치는 바람 소리, 반쯤 찬 양동이에 물방울이 하나씩 똑똑 떨어지는 소리, 뜨개바늘이 따닥따닥 부딪치는 소리, 인간의 심장 박동. 귀로 느껴지는 모든 음가를 악보에 적어 넣죠. 자신의 음악을 책으로 출간하고 싶어 출판사 여러 곳의 문을 두드리지만, 한 곳도 응해 주지 않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멜로디를 인간 음계에 억지로 편입시켰다’면서요. 같은 시기, 그가 속한 교구는 그의 무책임함을 힐난합니다. 아내를 떠나보낸 후 그가 신부의 본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보다 구상물인 자연에 더 관심을 갖는다고, 그를 내치려고까지 하죠.     


책은 온통 그리움과 거절, 고독과 괴로움뿐입니다. 특히나 등장인물인 체니 신부와 그의 아내 에바, 그리고 딸 로즈먼드 사이의 얽히고 물리는 관계성이 상당히 불안정하게 이어져서, 솔직히 말하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하고 거북했습니다. 부녀 갈등이 극에 달하고, 아버지가 딸과 절연하는 대목에서는 분노가 한껏 치솟기도 했습니다. 둘 중 어느 편에 서서 분노했냐고 하면, 당연히 딸 로즈먼드 쪽이죠. 그녀는 단지 태어난 것밖에 한 일이 없었거든요. 어머니의 죽음은 그녀의 탓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그녀에게 죄목을 씌운 것과는 달리 말이죠.      


하지만 책의 끝으로 향하며, 어쩐지 부녀 갈등은 단지 표면에 불과한 서사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시미언 피즈 체니 신부는 실존 인물입니다. 186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살며 자연물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기보했죠. 소설 속 이야기처럼 유고집 외에는 살아생전 한 번도 출간을 해 본 적이 없고요. 하지만 그에게는 딸이 없습니다. 아들만 한 명 있을 뿐이죠. 유고집을 낸 것도 역시 아들이고요. 그렇다면 작가 키냐르는 왜 딸인 ‘로즈먼드 에바 체니’라는 허구의 인물을 탄생시킨 걸까요. 그것도 아내의 이름인 ‘에바’를 딸의 이름 사이에 끼워 넣으면서까지 말이죠.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적자면, 딸 로즈먼드는 체니 신부 심연에 존재하는 아내의 조각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랑과 배신감, 책임감과 미안함이 공존하는. 현존하지 않지만, 늘 내면에 실재하는 아내의 화신이요. 하지만 로즈먼드가 아내를 대신하지 않고, 그녀의 ‘딸’인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내의 죽음’이 낳은 결과물이기 때문일 테죠. 체니 신부의 마음속 아내의 분신은, 아내의 죽음과 함께 태어난 무언가일 테니까요.     


그래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장성한 딸을 내쫓을 결심을 했을 겁니다. 28년 동안 마음속에 간직했던 아내의 존재를, 이제는 놓고 싶다는 표현이었겠죠. 하지만 그는 딸을 밀어내면서도 결코 아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든 신앙 활동을 중단하고, 아내가 가꾸어 놓은 정원에만 머무르며 그곳의 모든 소리를 기록하죠. 가끔 그녀의 유령을 만나기도 하면서요.      


하지만 아내의 화신인 딸은 그토록 미워하고 저주하면서, 아내가 남겨 둔 정원은 왜 그토록 사랑하고 아낀 것일까요. 전 처음에 그 태도의 모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역자의 말’을 읽으며 마지막 퍼즐 조각을 획득했죠. 책의 역자는 정원을 ‘체니 신부의 에덴’으로 해석합니다. 정원은 아내의 변형태로서 존재하는 현실의 공간이기 때문에 체니 신부에게 그곳은 ‘낙원’이라는 것이죠. 전 역자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낙원’이라는 키워드는 제게 한 가지 실마리를 주었습니다.      


정원이 체니 신부에게 에덴 즉, 낙원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단지 ‘아내가 만들어 둔 공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범한 정원이 어느 날 갑자기 낙원으로 변모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저는 정원을 단독 공간으로서의 ‘에덴’, 아니, ‘에덴을 모방한 공간’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완벽한 에덴이 될 수는 없지만, 에덴을 자꾸만 연상하게 만드는 공간으로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지상의 자연물을 보며 에덴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정원은 우리가 떠나온 낙원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인 것입니다.     


체니 신부의 아내 에바(eva, ‘이브’의 불어 표기)는 어쩌면 그래서, 모든 일에 무신경하고, 먹는 일조차 심드렁하면서도 정원 일에는 그렇게 열을 올렸는지도 모릅니다. 이름이 상징하듯이, 그녀는 쫓겨났던 천상의 낙원으로 복귀할 수 있기를 매일같이 꿈꾸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결국 죽음을 통해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이승에서의 삶을 놓고서 그토록 그리던 에덴으로 돌아간 것이죠.     


동시에 그녀가 했던 모든 정원 일은 체니 신부가 이어받습니다. 그는 아내만큼, 혹은 그녀보다 더 열렬하게 정원을 예찬합니다. 그녀가 남기고 간 ‘에덴의 모방 공간’을 가꾸며 현실을 완전히 잊어버리죠. 하지만 정원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아내의 분신인 딸에 대한 증오와 원망은 깊어만 갑니다. 딸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사랑과 같은 크기로 그녀를 미워하죠.     


딸을 향한 그의 타오르는 분노는 아내의 죽음과 부재를 온전히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사그라듭니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자마자, 그는 비로소 천상의 에덴으로 초대받죠. 지상의 모방 낙원이 아닌, 진정한 낙원으로 입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과 더불어 그가 평생을 바랐던 삶의 결실, 음악 원고도 세상의 빛을 보게 되죠.      


이렇게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체니 신부의 사랑과 증오가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해집니다. 그는 처음부터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정원’, 그러니까 ‘에덴’이라는 낙원을 사랑했죠. 그건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생기자마자 가족을 뒤로한 채, 먼저 그곳으로 향한 것이죠. 그러니 딸 로즈먼드를 향한 체니 신부의 감정 또한 ‘아내를 살해하고 태어난 딸에 대한 분노’가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자신을 두고 먼저 낙원으로 입장한 아내에 대한 배신감’일 테죠. 아내에게 미처 다 털어내지 못한 서운함을 딸이라는 분신에게 쏟아내는 행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나긴 투덜거림은 마침내 에덴으로 회귀하며 종결되죠.   

  

이제는 그의 모순된 분노와 정원을 향한 예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깊이 공감할 수도 있죠. 만약 제가 체니 신부였어도 그와 같은 형태로 사랑과 증오를 표출했을 테니까요. 나와 함께 에덴에서 쫓겨난 배우자가, 나보다 곱절은 먼저 원죄를 용서받고 낙원으로 회귀했다면, 그것도 내게 말도 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돌아갔다면. 분명 오랜 배신감에 몸서리치며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가 돌아간 낙원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겠지요. 그리고 그리움이 길어지다 보면, 정신을 놓고 미치광이처럼 그곳에 대한 찬가만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체니 신부의 모습 속에서 원죄 가득한 인류 전체의 모습이 보입니다. 에덴에서 추방되고, 에덴을 그리워하며 지상에서 에덴을 모방한 세계를 꾸리다가, 원죄가 옅어질 때쯤 다시 에덴으로 회귀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요.      


인간의 삶이 이토록 슬퍼 보이는 이야기는 참으로 오랜만에 읽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문학적인 카타르시스가 필요한 분께 추천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고, 자못 거북한 부분도 있지만, 이상한 해방감도 함께 밀려오는. 좋은 자극제와 안정제가 되어 주는 작품이거든요. 쌀쌀해진 날씨에 걸맞게 고독한 심연의 생각을 더듬고 싶은 분이라면, 한 번쯤 읽기 좋은 책입니다.



이 책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이유


언리미티드에디션 2023





< 우연히 만난 책들 >


책방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방을 방문할 때마다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을 한 권씩 구매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을 그냥 묵혀 두기 아까워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 우연히 만난 책들 >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글 모음집입니다.

글에서는 책방에서 책을 고른 이유와 책에 대한 소소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달 모나 Monah the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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