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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Dec 16. 2023

책을 이루는 문장과 문장을 쓴 작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기본에 충실한 서점, 책방 오늘


책을 이루는 문장과 문장을 쓴 작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기본에 충실한 서점, 책방 오늘



책방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간결한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책방이라는 공간의 의미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는 현재, 책방을 정의하는 방식은 책방의 개수만큼이나 무수하다. 어딘가에서 책방은 동네의 문화 공간이자 커뮤니티의 장이며, 배움의 장이자 공연 무대다. 또 다른 곳에서 책방은 카페 혹은 주점이라는 이름을 병행한다. 그만큼 책방이 살 이유는 많고, 또 지속하는 방법도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책방을 싸고 있는 여러 겹의 매력에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책방의 주인공은 언제나 ‘책’이라는 사실. 음식점의 주인공은 언제나 음식이고, 카페의 주인공은 결국 커피이듯, 책방의 주인공 자리에는 책이 존재한다. 책방에는 끝없는 수식어의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모든 미사여구의 끝에는 결국 ‘책’이 있다.     

 

난 언젠가부터 이 사실을 잊고 있었고, 어느 날 방문한 한 책방은 나의 망각을 일깨워주었다.      


 


‘책방 오늘’을 가기로 결심했던 건, 순전히 책방의 트레일러 영상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세상의 모든 간판들이 문장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다 같이 약속해서 상호를 그 아래에 쓰면 좋겠다고. 간판들마다 문장이 적혀 있다면 우리는 거리를 걸으면서, 또는 차창 밖으로 수많은 문장들을 읽게 되고, 그 문장들을 내건 주인들과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고, 도시 전체가 한 권의 책이 되지 않을까?


자분자분하게 시작되는 나레이션, 그리고 이어지는 간판에 대한 단상. 모든 문장에 꾹꾹 눌러 담은 책방의 철학을 접하는 순간, 난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상점을 문장으로 정의하고, 도시를 책으로 치환할 수 있는 상상력을 지닌 사람이 가꾸는 책방, 그곳은 분명 남다른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 글쓴이가 한눈에 반한 책방의 트레일러 ※     

분량상 여기서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내기는 힘들지만, 많은 사람이 꼭 한 번쯤 봤으면 해서 남겨 본다. 좀 더 시간이 있다면, 책방의 다른 이야기도 함께 읽어 보라. 전화부스와 눈송이 스튜디오 등의 공간 이야기, 그리고 달마다 계절마다 소개된 작가들의 이야기들도 적잖이 흥미롭다.     


책방 트레일러

책방 간판 이야기     



근거가 상당히 불충분한 이상한 믿음이었지만, 직관은 가끔 소름 돋게 들어맞을 때가 있다. ‘책방 오늘’이 바로 그런 경우다. 2023년 여름, 양재동에서 서촌으로 이사한 ‘책방 오늘’은 나만 몰랐을 뿐, 이미 수많은 단골을 보유한 서점이었다. 그중 몹시 흥미로웠던 사실 중 하나는 단골 대부분이 ‘책’이 좋아서 서점을 재방문했다는 점이었다.    

  

신기했다. 오로지 책 하나만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서점이라니. 책이 좋아서 다시금 방문하는 서점이라니.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서점이 아직도 존재한다니. 독서 황무지에서 오아시스 신기루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책에 대체 얼마나 정성이면 사람들이 오직 책 하나만을 위해서 다시 이곳에 방문할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인지 책방에 도착하자마자 난 탐구자 모드가 되었다. 책방을 방문하기 전부터 질문이 한가득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책방을 촬영하는 틈틈이 공간을 열심히 뜯어 보았다. 남몰래 조용히 톺아보기를 거치며, 난 서서히 ‘책방 오늘’이 왜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책방 오늘은 방문객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서점이었다.      


먼저, 책방은 좋은 책들을 ‘좋은 책’으로 소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책방 오늘의 매력 포인트를 하나만 꼽으라면, 난 주저하지 않고 책방의 메모를 말할 것이다. 책에 대한 메모를 붙여 둔 서점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독서하고 싶게 하는, ‘책에 구미가 당기게 하는’ 메모를 붙여 둔 곳은 책방 오늘이 처음이었다. 책 속 구절을 단지 옮겨 적은 것뿐인데, 어쩜 그리 명문들만 모아 두었는지. 잊고 있던 상념을 들추고, 감정을 파고드는 문장들을 살피다 보면 어느새 책의 나머지 부분이 읽고 싶어졌다. 오직 메모의 문장들로만 독서 욕구가 샘솟게 하는 곳은 ‘책방 오늘’이 처음이었다.      



책방에는 ‘작가의 서가’라는 책장도 있었는데, 계절(3개월)마다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해 그 작가에 관한 책만을 진열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서가라고 해서 선정된 작가의 책만 있는 건 아니었으며, 작가의 책과 더불어 작가가 추천하는 도서들도 책장을 채우고 있었다. 내가 방문한 날에는 ‘박연준 시인’이 이달의 작가였는데, 작가의 서가에는 시인의 책들과 함께 시인이 즐겨 보고 또 추천하는 열두 권의 책들도 꽂혀 있었다.      


작가의 추천 도서 근처에는 작가가 자필로 적은 메모도 붙어 있었는데, 난 유독 그곳에 붙어 있는 메모들이 좋았다. 책을 소개하고 권하는 문장들 속에서 작가의 생각과 취향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가치관이 듬뿍 담긴 메모들은 작가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주었다. 작가의 서가에서 작가는 단순히 책 뒤에 있는 직업인이 아닌, 또 하나의 독자이자 글 짓는 이, 사유하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작가의 서가가 3개월에 한 번씩 다른 작가를 소개한다는 점도 짚어 보고 싶다. 계절마다 다른 작가를 소개하는 건, 그 해의 그 계절을 그 작가로 기억한다는 말과도 같다. 세월이 지나 책방의 후기나 사진을 볼 때, 어느 작가가 책장을 장식하고 있었는지에 따라 책방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방의 한 시절을 작가의 이름으로 기억하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게 ‘작가의 서가’를 꾸린 책방의 본심이지 않을까. 만약 정말 그러하다면, 그건 책방이 ‘책방’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낭만일 것이다.      



작가의 서가 외에도 책방에는 ‘작가’를 품은 또 다른 공간이 있다. 바로 ‘오늘의 전화부스’라는 이름을 가진 공중전화부스다. 책방에 왜 느닷없이 공중전화부스가 있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전화부스에 설치된 공중전화는 사실 진짜 전화기가 아닌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멋진 기기다.      


오늘의 전화부스에서 수화기를 들고 벽에 적힌 메모대로 숫자를 누르면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작가들의 목소리가 50초 동안 흘러나온다. 물론, 세상에 없는 작가가 갑자기 살아 돌아온 건 아니기 때문에 수화기 너머의 소리는 전부 과거의 어느 시간 속에 박제된 녹음본이다. 하지만 사면이 막힌 공간에서 버지니아 울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바스와바 쉼보르스카, 제임스 조이스, 박완서와 박경리의 음성을 차례대로 듣다 보면 문득 수화기 저편에 정말 작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착각이 든다. 닿을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의 시간에 틈입하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그들이 내 시간에 방문하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공중전화부스라는 특수한 공간이 만들어낸 소리의 공명, 협소한 시야 그리고 후덥지근한 열기가 뒤섞여 만들어진 묘한 환상이다.      


책방은 오늘의 전화부스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환상의 연결고리를 ‘독서의 과정’이라 일컬었다. (이 또한 책방의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설명이다.)     


오늘, 의 전화부스는 다른 시간들을 오늘로 초대합니다. 다른 세계의 순간들이 이 세계로 접속됩니다. 아무렇지 않게, 그저 고요하게. 그런데 그건 어쩌면,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책을 읽을 때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일’. 책이라는 단절된 시공간 속에서 작가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연결되는 경험. 오늘의 전화부스는 독서라는 행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체감할 수 있게 하는 거대한 은유 상자였던 것이다.      


독서의 경험을 완벽하게 간파한 체험 부스가 있는 책방이라니. 그런 호사스러운 낭만이라니. ‘책방 오늘’은 정말이지 단골이 많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좋은 책과 좋은 작가와 좋은 낭만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골고루 갖춘 이곳을, 사랑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다시 오고 싶지 않을 이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책방을 나서기 전, 난 ‘비밀의 책 꾸러미’가 놓인 책장 앞을 서성였다. (비밀의 책 꾸러미는 책방 오늘에서 블라인드북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개인적으로 책으로 모험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책방에서 블라인드북을 구매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블라인드북을 선호하지 않음에도 비밀의 책 꾸러미를 구매하기로 마음먹은 건, 순전히 책방의 후기들 때문이었다. ‘블라인드북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책방 오늘의 책 꾸러미는 예상치 못하게 만족스러웠다’는 몇몇 후기에 얄팍한 나의 두 귀가 세차게 팔랑거렸던 것이다.      


짧고 간결하게 책을 소개하는 문장들 속에서 나는 잠시 행복한 고민을 했다. 모든 책 소개 문구를 한 번씩 읽어 본 끝에 나는 마침내 마음이 동하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책을 겹겹이 싼 종이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난, 지상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 거야. 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 저녁을 따뜻하게 할 수 있을 만큼만.” 
유리 조각처럼, 모래알처럼, 흩어진 기억들을 더듬더듬 읽어 가다 보면 어쩐지 가슴을 찌르르 울리는. 낯선 곳으로 떠나온 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시인의 소설.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아주 조금의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다짐에 공감하고, ‘시인의 소설’이라는 짧은 표현에 사로잡혀 난 망설임 없이 책을 골라 책방을 나섰다.     


※ 막간 추신 ※

혹시 ‘비밀의 책 꾸러미’의 결과가 궁금하다면, 위 영상을 확인 바란다. 답은 영상 속 어딘가에 있다. (사실 영상 끝날 때쯤에 있다. 책만 뭔지 확인할 거면 영상 재생하고 스크롤 뒤쪽으로 확 넘겨 보시라.)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오후, 책방 앞의 좁은 골목을 걸으며 어쩐지 전보다 영혼이 두터워진 기분이었다. 책방에서 단지 몇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수백 권의 책에 담긴 자양분을 온몸으로 흡수한 느낌이었달까. ‘책이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이 단지 상투적인 표현만은 아니라는 걸, 아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책방 오늘’은 기본에 충실한 서점이다. 문장의 마력을 아는 책방이다. 음식점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음식의 맛인 것처럼, ‘책’이라는 본질에 충실한 서점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 그러니 서촌에 가게 되면 책방 오늘에 들려보시라. 탄탄하고 깊은 내공을 갖춘 책방에서 분명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단골이 수두룩한 책방이지만, 더 많은 사람이 책방에 대해 알았으면 한다. 좋은 공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풍요로울 수 있도록, 말이다.      



책방 오늘

홈페이지 http://onulboo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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