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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Dec 30. 2023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를 큐레이션한 서점

온전히 한 작가만으로 공간을 꾸민, 다정한 책방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를 큐레이션한 서점, 온전히 한 작가만으로 공간을 꾸민, 다정한 책방



무라카미 하루키를 테마로 한 책방이 있다고 한다. 하루키의 책들로만 책장이 채워져 있고, 배경음악마저 하루키의 소설과 어울리는 곡들만 재생한다는 그곳.     


다음 책방은 어디로 갈지 뒤적이던 중, 한 책방의 특별한 큐레이션 소식은 날 두근거리게 했다. 오로지 한 작가만을 테마로 책방을 꾸미겠다는 생각은 어떤 비상한 창의력을 가져야 가능한 건지. 대체 얼마나 거대한 팬심을 가져야 가능한 건지. 그 기발한 아이디어에 한번, 실천력에 한 번 감탄하며 위시리스트(방문하고픈 책방 목록)에 책방 이름을 적어 넣었다.     


참고로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 아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그를 위한, 그의 (책들에) 의한 책방이라니, 안 가보고 배길 수 있겠는가?      



다정한 책방은 사당역 근처, 한적한 골목에 있는 책방이었다.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가게들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는, 주택가의 아담한 공간이었다.      


다정한 책방의 또 다른 이름은 ‘공유 서재’다. 시즌제로 운영되며, 분기별로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다는 그곳은, 첫 번째 시즌 동안 ‘독립서점이자 동네서점’으로 활약했었다. 당시 책방의 모습은 책을 파는 여느 서점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두 번째 시즌에 접어들며 ‘하루키 테마’의 공간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후, 책방은 더 이상 책을 팔지 않는다. 대신, 공간을 내어준다. 하루키의 책들로 공간을 가득 채운 곳에는 이제 빈손의 사람들이 오간다. 책을 읽고 싶은 사람들, 하루키의 글과 말에 잠기고 싶은 사람들. 그의 글에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글을 풀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책방을 찾는다.     


책을 판매하지 않아 책방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책방이 어디 책만 파는 곳이던가. 책을 읽고 즐길 수 있는 곳, 그 또한 책방의 한 형태다. 최근 들어 새롭게 생겨난, 현시대 책방의 한 모습이다.


※ 공유서재란?
: ‘공유서재’는 책을 판매하는 대신,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과 책을 내어주는 시스템을 말한다. 공유서재를 이용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곳도 있고,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 곳도 있으며, 이용을 위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곳도 있다.
   참고로 ‘다정한 책방’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자리 대여를 하려면 소정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비용은 자리별로 다르지만, 일반 카페나 북 카페 대비 부담이 되는 가격은 아니었다. 책방 이용 시 차도 한 잔 무료로 제공되니,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신다고 생각하면, 사실상 거의 비슷한 조건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물론, 책방에서 마시는 차는 전부 셀프다. 자기가 타 마셔야 한다는 소리.)     


공유 서재는 입장 방법부터 기존의 책방과는 다르다. 예약 페이지에서 미리 자리를 예약해 두면, 예약 시간 10분 전에 책방지기님으로부터 책방의 비밀번호가 적힌 문자가 도착한다. 책방은 무인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암호처럼 전달되는 비밀번호가 없으면 입장 자체가 불가능하다. 입장 암호(?)를 받았다면, 책방 주인이 된 듯한 기세로 당당하게 번호를 누르고 책방에 들어가면 된다. (공유서재마다 세세한 방식은 다르지만, 대체로 통용되는 방법은 이러하다.)     


그래서 나도 대세를 따랐다. 비밀번호를 받고, 책방 주인인 마냥 거드름을 피우며, (그러나 한쪽 눈으로는 연신 문자를 확인하며,) 비밀번호를 누르고 책방에 들어섰다.      


확신컨대 아무도 날 책 도둑으로 의심하진 않았을 거다.     



다정한 책방의 두 번째 시즌이자 첫 번째 테마 서점, ‘하루키의 방’은 ‘하루키의 서재’와 ‘하루키의 방’이라는 이름의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공간 중 책방 문을 열자마자 나타나는 곳은 ‘하루키의 서재’다.   

   

하루키의 서재는 이름에 충실했다. ‘서재’답게 책장에는 하루키의 책들만 가득했고, 벽은 온통 하루키의 문장들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책보다 먼저 다가오는 게 있었다. 짐을 풀기도 전부터 들려오는 음악. 하루키의 신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토대로 구성된 플레이리스트.     



진취적이지만 쓸쓸하고, 허무하지만 묘하게 그리워지는.
한 번도 알았던 적 없지만, 내내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어떤 공간. 어떤 사람.
그리고 어떤 이야기.



재즈와 음악을 사랑하는 하루키라는 작가를, 책방은 음악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3분 남짓한 음악들은 하루키라는 이름 아래 묶여 한 편의 새로운 서사를 써 가고 있었다. 여러 곡들 중 가장 ‘하루키’스럽다고 느껴졌던 건 스완 다이브(Swan dive)의 Augustine(어거스틴). 누군가를 아련하게 그리는 곡의 분위기가 하루키의 소설들과 닮아있어서였을까. ‘어거스틴’을 듣는 순간 불현듯 ‘이건 완전 하루키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느껴졌던 곡은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의 The end of the world(세상의 끝). 왜냐고 묻는다면, 소설 속 ‘도시’와 가장 잘 어울리는 분위기라서. 초월적인 몽환과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 상실의 고독과 재회의 슬픔이 배여 있어서.     


이쯤에서 소개하는, 하루키 플레이리스트

:  다정한 책방에서는 문학동네에서 제작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플레이리스트 재생되고 있었다.

   자세한 곡들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확인 바란다.

   https://youtu.be/U_uG-E7PkHE?si=89-VBMsAY-H4TFiW     



한참을 음악에 귀기울이다, 천천히 하루키의 책들을 살펴보았다. 하루키의 서재에는 온통 하루키의 책들뿐이었다. 소설부터 수필, 잡문집까지. 하루키가 집필했고,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라면 출판 시기와 판본을 가리지 않고 놓여 있었다. (심지어 몇 권은 천장에 걸려 있기도 했다. 전구 곁에서 날아갈 듯한 몸짓으로 대롱대롱.) 하루키의 열렬한 팬이 아니라서 어떤 책인지 정확히 짚을 수는 없었지만, 책방의 설명에 따르면 책방지기님은 품절 된 책들까지 공수해 책장을 꾸몄다고 한다. 그러니 현재로서 구할 수 있는 웬만한 책은 다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루키의 책장 반대편에는 하루키가 영감을 받았다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 열 권 남짓 한 책의 표지에는 그 책이 책장에 도달하게 된 이유가 적혀 있었다. 하루키가 유독 좋아했던 작가와 작품, 그리고 하루키가 반드시 번역하리라 결심했던 책까지. 하루키의 인터뷰와 족적을 꼼꼼히 살펴본 사람만이 정리할 수 있는 형태로, 책장을 꾸려져 있었다.     



하지만 수십 권의 책들보다 눈을 사로잡았던 건, 벽을 뒤덮은 ‘하루키의 문장’. 책방은 책장을 제외한 모든 벽면을 하루키의 문장들로 빼곡히 채워 두었다. 소설의 첫 문장과 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문장들, 이야기의 조각들, 수필의 좋은 구절들까지. 하루키의 언어는 겹겹이 연결되어 거대한 문장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종이에 적힌 하루키의 문장들을 감상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작가를 이만큼 좋아해 본 적이 있던가. 몇백 장의 종이들을 손수 인쇄하고 붙일 정도로 누군가를 애정해 본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책방은 한층 더 특별해 보였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공부를 일삼는 사람은,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사랑을 돌려받을 가치가 있다. ‘다정한 책방’은 그 말에 정확히 부합하는 곳이었다.      




하루키의 서재 안쪽으로는,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하루키의 방’이 있었다. 올해(2023년) 출간된 하루키의 신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모티브로 한 공간은 초록색과 빈티지한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하루키의 방에는 하루키에 대한 몇 권의 책들과 하루키를 테마로 한 소소한 소품들이 있었다. 하루키의 영원한 영감, 비틀즈의 액자와 설명이 담긴 책자가 벽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었고, 전업 작가가 되기 전 하루키가 운영했던 재즈바, 피터캣을 테마로 한 그림 액자도 놓여 있었다.      


그리고 메모들도 있었다. 작은 메모판에 붙어 있는 하루키에 대한 지식들. 하루키의 세계에 입문하는 방법이나 하루키의 하루 일과 그리고 MBTI와 같은 잡다한 정보들. 하루키에 대한 사실들에 책방지기님의 상상력이 덧붙은 글은 소소하게 읽는 재미가 있었다. (메모의 자세한 내용은 영상 중후반쯤(5분대) 있으니 궁금하다면 참조해 보시라.)      



하지만 하루키의 방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의외로 하루키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키의 방에는 두툼한 공책이 몇 권 놓여 있었는데, 전부 방문객들의 글들로 이루어진 방명록이었다. 여느 책방에나 방명록은 있었지만, 다정한 책방의 방명록은 다른 책방들과는 달랐다.      


다정한 책방의 방명록에는 저마다의 키워드가 있었다. ‘고민 상담, 타임머신, 소설 이어적기와 아무 말’이라는 키워드. ‘고민 상담’ 공책에는 말 그대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고, ‘타임머신’ 공책에는 1년 후 자신이 되어 지금의 자신에게 글을 남길 수 있었다. ‘소설 이어적기’ 공책에는 앞 문장과 어울리는 다음 문장을 사람마다 한 문장씩 이어 적을 수 있었고, ‘아무 말’ 공책에는 일반적인 방명록처럼 아무 말을 쓸 수 있었다.    

  

방명록에 단순히 키워드만 붙었을 뿐인데, 다정한 책방의 방명록에는 여느 책방에서 볼 수 없는 활기가 있었다. 다녀간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민과 투정, 목표와 다짐, 그리고 어디에서도 밝힐 수 없는 속 이야기들을 적었다. 주제가 뚜렷해서 그런지, 사람들의 필력에는 저마다의 개성이 배어 있었다. ‘잘 다녀간다’라는 상투적인 말이 아닌,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담긴 글을 읽는 재미는 생각보다 꽤 쏠쏠했다.      



여러 방명록 중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건 ‘고민 상담’ 공책이다. 고민이 가득 담긴 공책에는 페이지마다 책방지기님의 ‘답글’이 달려 있었다. 날것의 진솔한 고민들, 막막하고 갑갑한 누군가의 걱정들에 책방지기님은 일일이, 전부 답장을 남기며, 그들의 근심과 서러움, 답답함과 슬픔에 깊이 공감해 주었다.      


책방을 다니면서 다수의 방명록을 봤지만, 손님들의 글에 책방지기가 답을 남긴 곳은 다정한 책방이 처음이었다. 책방지기님이 남긴 위로의 말을 읽으며, 책방의 이름에 ‘다정하다’라는 말이 들어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책방지기님은 본래 빵집을 열고 싶었다고 한다. 따뜻한 빵에 마음을 실어 보내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고 싶었다는 것. 하지만 모든 꿈이 그렇듯, 빵집이라는 꿈은 시간과 함께 흘러갔고, 잠시 인생의 휴식기에 접어든 책방지기님은 빵집 대신 서점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업종만 바뀌었을 뿐, 책방에는 여전히 따뜻함이 있었다. 고소하고 따스한 빵은 아니었지만, 책방의 방명록에 적힌 말에는 어떤 빵도 대체할 수 없는 온기가 배어 있었다.  

    

따뜻한 온기를 전하고픈, 책방지기님 인터뷰



책방을 구경한 후에는 향긋한 과일 차를 한 잔 내리고, 하루키의 첫 번째 장편소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40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그의 신간 장편소설을 테마로 한 방에서, 하루키의 첫 번째 장편소설을 읽는 시간이, 어쩐지 수미상관의 행위처럼 느껴졌다.     


깊은 사과 향이 우러난 차를 마시고, 책장을 넘기는 사이사이, 나는 책방의 민낯에 대해 생각했다. 하루키의 딥 큐레이션이 없던 시절, 책방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특정한 작가나 특수한 테마가 아닌 다정한 책방이 그 자체로서 메인 테마였던 시절. 손님들이 비밀번호로만 은밀히 들고 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여느 책방처럼 손님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책방지기님과 인사를 나누던 그곳. 그곳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아련한 궁금증으로 가득해졌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이 질문은 아마 풀리지 않는 오랜 궁금증으로 내 안에 남게 될 것이다.     



이쯤에서 책방의 또 다른 비밀을 밝힌다. 다정한 책방의 하루키 큐레이션은 12월을 마지막으로 종료된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것이 아닌, 미리 예정된 일이었다.) 그러니 이 글 업로드일을 기준으로 하면, 책방의 ‘하루키’ 시즌은 하루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혹시 당신이 하루키 팬이었다면, 그래서 위 글을 반짝이는 눈으로 꼼꼼하게 읽었다면, 이쯤에서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 하루키 테마 책방을 – 하루키의 팬도 아닌 - 글쓴이만 다녀와서 참으로 미안하다.)     


하지만 섣불리 실망하진 말자. 다정한 책방은 시즌제로 운영되는 책방이다. 그러니 한 시즌의 끝은 곧 새로운 시즌의 시작이라는 말과도 같다. 다가오는 2024년 1월, 책방은 세 번째 시즌으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이번에는 또 다른 작가와 테마로, 공간을 꾸며 놓고서.      


새해 첫 달에 공개될, 다정한 책방의 새로운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다정한 책방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so_sweet_books/

네이버 예약 (책상별 대여, 1-2인용)

https://m.place.naver.com/restaurant/1269543731/booking

스페이스 클라우드 예약 (전체 대관)

https://www.spacecloud.kr/space/39235?type=search

※ 책방은 현재 영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달 모나 Monah the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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