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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Jan 13. 2024

우연한 행복을 안겨 주는, 초록 대문의 서점

세렌디피티 같은 공간, 책방 그리고

우연한 행복을 안겨 주는, 초록 대문의 서점, 세렌디피티 같은 공간, 책방 그리고


우연한 순간은 한 번도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하면, 우연은 사념 어딘가에 간직해 온 생각의 발현이다.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조차 지각하지 못한 어떤 상상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할 때, 우리는 그걸 ‘우연’이라 부른다.      


공간을 발견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한 어떤 가게, 상점, 음식점, 그리고 책방. 우리가 어떤 공간 앞에서 우연히 걸음을 멈춰서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재해 있던 어느 생각이, 이제 마침내 만개한 것뿐이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도시의 좁은 골목길, 지나는 사람들의 걸음을 한 번쯤 멈추게 하는 서점이 있다. 서점을 발견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방문 후기를 적었다. 서점이 있는지도 몰랐던 길목에서 “우연히” 책방을 마주하게 되어 참 기뻤다고. 상상으로만 그렸던 서점을 만나게 되어 행복했다고.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우연은, 결코 하루아침에 불쑥 던져진 감정이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꿈을 꾸지 않던가.
낯선 골목길을 걷다, 상상으로만 어렴풋이 그리던 어떤 장소를 마주하기를   


‘책방 그리고’는 그런 상상에 부합하는 서점이었다.      



‘홍대 입구’라는 지명이 무색할 정도로 고요한 거리, 두세 사람이 어깨를 부딪치며 걸을 수 있는 샛길에는,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초록 대문의 서점이 있다. 연한 에메랄드빛 문과 아치형 창살, 싱그러운 튤립이 손님을 맞이하는 책방은 발견한 것만으로도 무엇인가 충족된다.   

   

책방을 보는 순간, 책방의 방문 후기들이 한순간에 납득이 갔다. 가느다란 길에서 마주한 책방의 첫인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잔잔한 감동이 있었다.      


책방 문을 열자마자 책방지기님께서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내 소개를 마치자 난로 앞의 자리와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어주셨다. 외투 안까지 파고들었던 추위가 서서히 가시는 것을 느끼며, 나는 책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입구에서부터 진한 인상을 남겼던 동화 같은 책방의 분위기는, 안쪽에서도 계속되었다. 책방은 내부마저 유럽의 작은 상점 같았다. 책방이 그런 ‘독특한’ 감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건, 공간을 가득 채운 이국적인 색감 덕분이었다.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공간의 색깔. 너무 무겁지 않은 호두나무 빛의 바닥과 책장 그리고 가구들.      


책방지기님은 공간의 통일성을 위해 책장과 카운터를 별도로 주문 제작했다고 한다. 다른 가구와 소품들 또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하나씩 고심하며 구매하셨다고. 미술학도였던 책방지기님은 그만큼 책방의 세세한 부분까지 조형미와 색감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리고 공간은 당연히, 정성을 들인 만큼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책장에 진열된 책들은 ‘책방 그리고’만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책방 그리고’의 책들은 단 한 권도 옆으로 꽂혀 있지 않았다. 책방에서 책의 앞면이 보이도록 놓는 건 흔한 일이지만, 이렇게 모든 책들이 ‘전부’ 앞면이 보이도록 진열한 곳은 ‘책방 그리고’가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책들에는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책방 그리고’의 책들은 모두 어딘가에서 한 번쯤 보고 들은 적이 있었다. 주로 문학, 인문학, 철학, 심리학, 고전 등 대중적인 장르의 서적들이어서,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서점과 같이 책을 대규모로 다루는 어딘가에서 분명 마주친 적이 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서점에서 봤을 당시에는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책들이었다. 필독서거나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라는 사실 정도만 어렴풋이 알고는 있을 뿐, 굳이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책이 흘러넘치는 대형서점, 혹은 몇몇 책만 집중 조명되는 온라인 서점에서는 한 권의 책을 깊이 있는 기억으로 간직하기가 힘들다. 판매에 주력하는 책이 아니라면 뒤로 밀려나거나 혹은 옆으로 빼곡하게 꽂혀 있어 어떤 책이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책의 홍수 속에서는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눈에 들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책방 그리고’에서는 달랐다. 이곳의 책들은 전부 전면을 보고 있었고, 한 권씩 찬찬히 뜯어볼 수 있도록 넉넉하고 여유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모든 책들에게 눈이 갔다. 대형서점 등에서 얼핏 알고 지나갔던 책들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한 번도 유심히 들여다본 적 없던 책인데도 이곳에서만큼은 어쩐지 손이 가고, 호기심이 생겼다.    

  

아마 책을 방해하는 어떠한 요소도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책방 그리고’에서는 책이 가장 순수한 상태의 ‘책’으로서 존중받고 있었다. 화려한 문구나 번쩍이는 광고판, 거대한 중앙 매대,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사은품 등, 책을 겹겹이 둘러싼 모든 상업적인 것이 사라진, 오로지 순수한 상태의 ‘책’만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구매자로서의 피로감이 사라지자, ‘책’ 그 자체에 전보다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책을 가리키던 수많은 화살표들이 사라지자, 오히려 그 가운데에 서 있던 책이 더 빛나 보였다.


오로지 책으로만 가득한 공간.
‘책방 그리고’에서 책은 어떤 목적도 없이, 가장 순수한 상태로 존중받고 있었다.     



비단 책만은 아니었다. 책방지기님은 책을 대하는 마음으로 책방의 손님들을 응대했다. 책방지기님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즐거워 책방을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서점을 오가는 손님들의 세세한 일화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수능을 막 끝내고 들렸던 고등학생들, 여행 중에 들른 외국인(한국어를 읽을 줄도 모르면서 표지가 예쁘다고 책을 사갔다고 한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 글을 쓰는 사람들,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는 독서인들까지(그중에서는 책방지기님과 취향이 꼭 같아서 책방에 자주 들르는 단골도 있다고 한다.). 손님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 놓는 책방지기님의 목소리에는 밝은 기운이 묻어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책방지기님이 책방과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하는지. 

  


책방지기님의 그런 마음이 손님들에게도 전해져서일까. 손님들은 종종 뜻깊은 선물을 가져와 책방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준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책방에서 책을 사면 받을 수 있는 정사각형 그림엽서다. 그림엽서의 양면에 담긴 그림은 책방에 방문한 한 손님의 선물이다. 책방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한 손님이 주섬주섬 건넨 스케치는 책방지기님에게 잊지 못할 감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책방지기님은 그 스케치로 책방의 굿즈를 제작했고, 그 후로 책을 구매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받았던 감동을 한 장씩 나누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엽서에 대해 설명하던 책방지기님은, 내게도 그 감동을 한 장 건네주셨다. (언제나처럼) 책방에서 책을 한 권 구매했기 때문도 있지만, 책방지기님은 자신이 받았던 기분 좋은 감동을 내게도 전해 주고 싶다고 하셨다. 책방의 상징 같은 에메랄드빛 입구를 담은 일러스트는 그렇게 내가 구매한 책 사이에 들어와 ‘이야기가 담긴 책갈피’가 되었다.      



책방을 나서기 전, 책방지기님께 물었다. 어째서 책방의 이름을 ‘책방 그리고’라고 지었냐고. 질문을 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리고’라는 접속사 뒤에 숨겨진 명사가 무엇일지 궁금해서. 완결되지 않은 ‘그리고’라는 말, 여운이 담긴 책방의 이름에는 어쩐지 생각지도 못한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책방의 이름에 담긴 의미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방대했다. 책방지기님은 책방의 이름, ‘책방 그리고’에 총 세 가지의 뜻이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접속사로서의 ‘그리고’. 책방과 함께하는 사람들, 손님들, 책들, 이야기들을 연결하는 연결고리로서의 의미를 담은 표현이었다. 둘째는 동사 ‘그리다’의 변용으로서의 ‘그리고’. 미술학도인 책방지기님이 운영하는 책방이자 작은 그림 작업실이 되어 주는 공간을 소개하는 말이었다. 마지막은 동사 ‘그리다(그리워하다)’가 변형된 ‘그리고’. 책방을 오가는 수많은 이들과 책들을 그리는, 책방지기님의 사려 깊은 시선이 담겨 있는 문구였다. (물론, 그리움은 상호작용하는 파동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그리움’에는 당연히 책방을 그리는 손님들의 시선도 담겨 있다.)     


세 가지 모두 책방에 잘 어울렸지만, 아무래도 잔향처럼 오랫도록 남아 있던 건 세 번째 의미였다. 책방에서 그리워하고, 책방을 그리워하는, 상호 교차하는 마음들. 아마도 책을 매개로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책방지기가 있는 서점을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말이어서, 유독 더 기억에 오래 맴돈 듯하다.    

  

책이 책 본연의 모습으로도 소임을 다할 수 있고,
책방에 들어서는 사람들마저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되는 곳.


책방을 ‘그리고’ 책방지기님이 ‘그리는’ 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기를. 어여쁜 작은 책방, ‘책방 그리고’가 오래도록 홍대의 골목에 남아 사람들에게 우연한 행복을 안겨 주는 동화 같은 책방이 되기를, 바란다.      



책방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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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달 모나 Monah the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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