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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Jul 04. 2018

처음 만난 스위스의 낮과 밤

현실은 상상보다 아름다웠다.

스무 살 초반의 나에게 스위스의 이미지는 지루했다. 아무것도 몰랐으니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고작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과 비싼 물가뿐이었으니까. 2011년의 나는 유럽의 곳곳을 다니면서도 지루할 것 같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으로 스위스는 제외했다. 몰라서 용감했던 거다.


다시 찾은 유럽 여행 일정에는 스위스가 포함되어있었다. 전체 유럽 여행 일정의 약 3분의 1이 스위스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스위스에 꽤 오래 머물렀다. 정확히는 인터라켄에 4일 동안 머물렀다. 나름의 발전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스위스에 대해 아는 사실은 별로 없었고 블로그 속에 올려진 사진 속 스위스를 상상하며 인터라켄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에서는 긴장이 풀려 잠을 자기 바빴다. 인터라켄에는 자정이 넘어 도착했다. 같은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있어서 덜 무서울 거라 생각했지만 대단한 착각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혼자 숙소로 가는 길이 무서웠다. 기차역에서 한 분에게 말을 걸었으나 듣지 못했다. 역을 나섰고 나를 제외하고 약속이나 한 듯 다들 역 근처의 숙소로 향했다.


가로등 불빛도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정이 넘은 고요한 새벽, 인터라켄에는 나 혼자였다. 뒤를 둘러봐도 앞을 봐도 사람이 없었다. 캐리어 바퀴가 도로에 요란하게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내가 끄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그렇게 무서운 것은 처음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외국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처음이 아니었는데 그 당시에는 처음이라고 착각했다. 정말 길에 사람 하나 차 하나 안 보이고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밤이었지만 공기가 맑다는 느낌이 들어 아이러니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가로등 빛이 은은하게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누가 있을 때보다 아무도 없는 게 무서운 것은 처음이었다. 하나도 무섭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유독 나는 겁을 먹고 움츠러든 어깨를 피려 부단히 애를 썼다.


요란한 캐리어를 재촉하며 숙소를 향해 걸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역시나 말을 듣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 내 이름이 적힌 침구와 키를 들고 방으로 갔다. 처음 숙소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없어서 재빨리 씻고 나왔다. 한국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주 일찍 융프라우에 올라가야 해서 말도 없이 바로 잠들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기, 너무 어둡지도 밝지도 앉은 새벽

내가 처음 만난 스위스 인터라켄의 밤이었다.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조식을 먹으러 갔다. 식당으로 가는 길 복도에는 커다란 통유리가 있었다. 나는 거기서 한참을 멈춰서있었다. 하늘은 맑고 청아했다. 구름은 켜켜이 쌓여 커다란 제 몸집을 자랑했다. 나무는 짙은 녹색 잔디는 생생한 초록색을 띄었다. 창문 앞에서 한 참을 서있었다. 그제야 스위스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호스텔에서 만난 일행들과 간단하게 조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하면서 인터라켄의 또 다른 매력에 대해 알게 됐다. 액티비티가 유명하다는 것. 같이 조식을 먹던 분이 패러글라이딩을 꼭 하고 싶었는데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게 맞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융프라우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새벽에 지나왔던 길을 반대로 걸어갔다. 어제랑 똑같은 위치, 똑같은 길인데 평화롭고 안정적이고 밝았다. 기차역에서 융프라우 패스와 신용카드 검사도 하고 기차에 올랐다. 그린델발트에 올랐다.


평범한 기차를 타고 산 위를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다니.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히 졸졸졸 흐르고 있을 시냇물, 맑은 하늘.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 스위스는 훨씬 더 굉장했다. 몇 번의 기차를 갈아타고 융프라우 정상에 올랐다. 공기가 차가워지고 팔을 움츠리게 되자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구나를 실감했다. 얼음 동굴을 지나 융프라우 정상에 올랐다. 산 아래에서 맑고 청아했던 하늘은 어디 갔는지 구름이 잔뜩 낀 융프라우였다.



하늘이 맑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융프라우에 올라와 사진을 찍은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패스에 포함되어있던 컵라면 쿠폰을 사용했다. 융프라우에서 먹는 신라면이라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국물을 먹는 순간 다 잊어버렸다. 내려오는 길도 올라갈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차에 앉아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편안했다. 


현실은 내 상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인터라켄으로 다시 돌아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인터라켄을 처음 마주하고 나서는 스위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조용하고 안정적이고 아름답다. 그것만으로도 지친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됐다. 기차에 앉아 풍경을 멍하니 황홀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갑한 마음은 좋은 공기를 들이마시자 금세 잊혔다. 




힘들게 마음의 짐을 억지로 덜어내려 하지 않아도 그 풍경 속을 걷고 있으면 '내려놔야겠다'가 아닌 어느새 자연스럽게 짐을 내려놓고 산책을 하는 내가 있었다. 인터라켄은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머릿속 복잡하고 가득한 생각을 비우고 싶다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쉬고 싶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위로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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