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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Nov 18. 2016

그땐 몰랐던, 특별했던 보통날

두 번째 유럽, 세 번째 파리 셋째 날

알람에 맞춰 일어나서 눈만 깜빡였다. 원래 예정된 일정은 지베르니(Giverny)에 가는 거였지만 지난 이틀 동안 무리해서 걷는 바람에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상태였다. 이런 몸 상태로 나가는 건 스스로에게 좋지 않다고 세뇌시키며 일정을 변경했다. 체력이 문제인지, 앞선 일정을 잘 못 짜서 생긴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일정이 변경된 김에 늦잠을 잤다. 조금 더 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은 여전히 뻐근했다. 일어나서 밥을 먹고 누워서 멍 때리다가 열 시쯤 느지막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정이 변경되었지만 사실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계획이 없으니 관광지로 유명한 마레 지구와 메르씨(merci) 매장을 구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파리에 오면서 마레 지구 쪽으로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행히도 마레 지구가 숙소에서 (지도상으로) 멀지 않은 것 같았다. 까르네도 다 떨어지고 시간도 많았기에 걷기로 했다.


반수면 상태로 걷다가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어느 정도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아, 잊고 있었다. 내가 왜 일정을 변경했는지 말이다. 조금 걷자 종아리를 넘어서 허벅지가 당기기 시작했다. 걷기도 힘들 정도로 아파왔다. 그렇다고 숙소로 돌아가기도 애매하고 지하철을 타기도 애매해진 거리에서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렇게 걸어가다 중간에 공원을 만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였지만 공원은 'square du temple'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짙은 녹색의 철제문을 열고 공원으로 들어갔다. 잠깐 쉬어가기에 적절한 공간이었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에는 벚꽃과 비슷하게 생긴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끌었다. 단연 눈에 띄었지만 그럼에도 주변 식물들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벤치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왜냐면 남는 게 시간이었고 다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square du temple


공원에 들어서자 은은한 꽃내음이 전해졌고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한가로웠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약간 겁을 먹었지만 그래도 휴식을 포기할 수 없어서 일단 앉아 있기로 했다.


처음에는 잠깐 앉아서 공원 사진만 몇 장 찍다가 가려고 했었다. 천천히 둘러본 공원에는 작은 놀이터도 있었고 작은 연못도 있었다. 꽃들도 제각기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어느덧, 하나 둘 늘어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고쳐 연못이 보이는 벤치로 자리를 옮겨 앉아 수첩을 꺼냈다.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로 우산을 챙기는 바람에 가방의 무게가 엄청났던지라 이날 수첩을 갖고 나오는 것을 고민했었다. 그런데 이 날 가장 유용하게 사용한 것이 수첩이었다. 수첩을 꺼내서 일기를 쓰려고 하는데 자세가 여간 편하지 않아 글씨가 제멋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다.


한참을 공원에서 앉아 있다가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마레지구를 지나 메르씨 매장에 도착했다. 11시쯤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오픈 시간인 것 같았는데 직원들밖에 없는 것 같아서 머쓱했다. 가장 유명한 팔찌를 고르러 가니 한국 여행객 분들이 고르고 계셨다. 옆에서 조금 기다리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팔찌의 종류가 생각보다 많아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종류가 다양해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일단 검은색 줄이 있는 건 5유로였다. 기본적인 3유로 팔찌도 하나 샀다. 친구들을 위한 팔찌를 보는데 연한 회색 빛이 도는 팔찌와 하늘색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 사이에 점원이 와서 인사를 건넸다.


‘어느 색이 인기가 많아?’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쉬운 불어도 하지 못했을까. 어쨌거나 23유로라는 나름 거대한 돈을 지출하고 결국엔 매장 앞에 있는 지하철을 탔다. 다리 상태가 좀 심각할 정도로 안 좋았다. 샹젤리제에 내렸으나 여전히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샹젤리제 역에서 내렸는데 출구로 나오니 샹젤리제 거리와 콩코드 광장의 중간이었다. 그래서 샹젤리제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는데 거리 중간에 가림막을 친 상태로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배우들이 옛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나름 신선한 경험이었다. 결국 무슨 영화 촬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샹젤리제를 걸으면서 가고 싶었던 디즈니 스토어에 가기로 했다. 어렵지 않게 디즈니 스토어를 찾을 수 있었고. 홀린 듯이 들어갔다. 닉과 주디 썸썸을 발견했는데 사려다가 지갑 사정에 잠시 멈칫했다. 전전날 무리해서 화장품을 산 값이었다. 디즈니 스토어 파리에는 미키 마우스가 화가처럼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난 이 별거 아닌 사실이 나중에 나에게 어떻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디즈니 스토어에서 나와서 걷다가 스타벅스가 보이기에 냉큼 들어갔다. 아이스 카페 라테를 시켰는데 커피도 아니었고 물도 아니었으며 밍밍하기 그지없었다. 수첩을 꺼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꽤 많이 썼는데도 시간이 안 갔다. 더럽게 안 갔다. 2시도 안 됐다. 일단 나와서 걸었다. 


프랑스 영화관, 결국엔 들어가지 못 했다.


개선문에서 사진을 찍고 나서 할 일이 없어서 콩고드 광장을 향해 걸었다. 이쯤에서 다리가 진짜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벅지 아래쪽이 제대로 당기기 시작했다. 콩고드 광장에 도착해 튈르리 정원에 들어갔는데 샌드위치가 너무 비쌌다. 그래서 안젤리나가 있는 쪽으로 가면 케밥집 하나쯤 있겠지 했는데 그게 오산이었다. 내가 못 찾은 건지 모르겠지만 진짜 빙빙 돌고 돌아도 그 주변에 단 하나의 빵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빵집을 찾아 헤매다가 명품 거리로 들어섰고 오페라까지 가게 됐다. (일기를 정리하면서 드는 생각은 차라리 이날 지베르니에 가는 게 다리가 덜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다) 오페라 근처에서 정말 다리가 걸을 수 없을 정도 아파서 가깝지는 않았지만 퀵(Quick)으로 향했다. 1층이 뭔가 휑해서 아픈 다리로 꾸역꾸역 2층에 올라가 햄버거를 먹었다. 오페라 근처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통유리로 보이는 거리의 모습이 깨끗하고 경치가 참 좋았다. 그렇게 한 끼를 때우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날은 별 다른 일 없이 조용히 흘러갔다.



이렇다 할 큰 사건도 없이 잔잔하게 흘러갔던 하루다. 일기를 꺼내 다시 읽을 때만 해도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하루라고 생각했다. 글을 정리하면서 다시 천천히 그 날로 되돌아갔다. 이제야 느낀 것이지만 이날 우연히 마주한 공원에서의 잠깐은, 이번 유럽 여행에서 행복했던 날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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