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언니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2005년 3월이었다. 언니는 2년 선배로, 내 3학년 짝언니의 단짝이었다. 우리 학교에는 ‘짝’이라는 말을 붙여 관계를 맺는 짝문화가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금지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짝언니와, 짝오빠, 짝친구, 짝동생 등 다양한 짝관계를 만들었다. 더러는 짝남매나 짝친구끼리 사귀게 되는 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짝문화의 취지대로 서로 챙겨주며 가족처럼 지냈다. 학년마다 딱 한 명씩만 맺을 수 있는 관계였고, 그래서 더 특별한 사이가 되곤 했는데, 신학기에는 익숙한 사이가 되기 위해 특히 자주 만났다. 나도 가족 대신 나를 챙겨주는 짝언니가 좋았다. 언니가 내게 해줬듯 틈틈이 쪽지를 써서 언니를 보러 갔고, 그때마다 지혜 언니도 함께 만났다. 지혜 언니는 때때로 짝언니보다도 나를 귀여워해줘서 나도 무척이나 언니를 따랐다. 처음에 언니는 어딘가 일진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오로지 공부만 하려고 들어온 학교 안에서도 몸에 딱 맞는 교복을 입고, 귀밑 5센티미터라는 두발 제한에도 불구하고 샤기 컷을 고집했으며, 그냥 생긴 게 그렇기도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묘한 동질감이 들었고, 막상 가까워지자 언니는 무섭기는커녕 마주칠 때마다 나를 안아주어서 나도 덩달아 언니를 꼭 안고 괜히 계단을 한 번 더 오르락내리락하거나 살 것도 없으면서 매점에 들르곤 했다. 그때마다 언니는 동방신기 콘서트에 갔다가 압사당할 뻔한 이야기나, 부모님 몰래 저지른 일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언니가 대학은 어쩌려고 저러나, 하고 걱정했다.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언니는 언제나 해맑았고, 나는 그런 언니가 좋았다. 욕을 차지게 하는 언니가 좋았고, 대놓고 교칙을 무시하는 언니가 좋았고,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언니가 좋았다. 고3 특유의 불안감은 있었지만, 언니의 행동에는 언제나 내가 갖지 못한 여유가 있었다. 그건 사랑받고 자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언가였다.
서로를 좋아했지만 두 학년이나 차이 났던 우리는 함께 보낸 시간이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학생들이 경기도 전역에서 모인 고등학교 특성상 다른 지역에 살던 우리는 언니의 졸업 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서로의 싸이월드를 오가며 안부를 전하는 것과 이따금 메시지를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싸이월드가 망하고 페이스북이 뜨면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언니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건 내가 대학원에 다니던 2014년이었다.
언니의 소식을 듣기 며칠 전, 나는 소설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날은 내가 합평을 받는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연애를 시작한 지 육 년 만에 처음으로 계획한 제주도 여행에 애인을 먼저 보냈다. 전날 제주도에 먼저 도착한 애인은 그답지 않게 본인의 페이스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합평을 받기 직전까지 내게 바다와 돌담 사진 등을 보내주었다. 다음 날이면 나도 제주에 있을 것이기에 덩달아 기분이 방방 떴다.
그날 합평받은 소설은 애인의 이야기였다. 나 네 이야기 써도 돼? 하고 물었을 때 그가 마음대로 해,라고 해서 나는 어떻게 저렇게 재수 없을 수가 있지, 하고 생각했던 그의 불행을 하나하나 옮겼다. 이런 삶도 있다고.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악에 받쳐 싸울 때마다 나는 네 불행이 내 불행이 되는 게 지겹다 했었고,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고 나서는 그가 죽을까 봐 늘 겁을 먹었다. 그의 불행은 진부했지만 막상 주위를 둘러보면 이렇게까지 불행한 경우는 정말 드물어서 나는 진심으로 그가 죽을까 봐 자주 두려웠다. 그만큼 곁에서 지켜본 그의 삶은 힘들다는 말로는 부족한 무엇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보다 강한 사람이었고, 오히려 내 불행으로 인해 그가 불필요한 고통까지 감수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어렵게 여행 자금을 모아 처음으로 꿈꾸던 제주도에 가게 된 것이다. 강의실로 향하면서 그에게 다녀오겠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그는 잘하고 오라는 말과 함께 바닷가를 걷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남은 몇 분 동안 별생각 없이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켰다. 그런데 포털 메인에 눈에 띄는 기사 제목이 보였다. 350명 탄 여객선 진도 해상서 침몰 중. 놀라서 클릭했더니 전남 앞바다에서 제주행 여객선이 좌초되어 침몰 중이며, 거기에는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 등 350여 명이 탑승 중이라고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전원 구조’라고 했다. 곧 ‘전원 구조’가 들어간 제목의 속보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나는 안도했다.
교수님과 다른 분들도 기사를 보셨는지 우리는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속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도 빠짐없이 구했다니 정말 다행이라고. 우리나라 정말 대단하지 않으냐고. 그 애들, 수학여행은 망쳤어도 평생 대단한 안줏거리가 생겼다고. 원래 사고가 나면 배가 생존율이 제일 높다고. 그렇게 얼마간의 이야기가 오간 뒤 합평 수업이 시작됐다. 몇 가지 질문이 들어왔고, 나는 애인을 모델로 한 화자가 술을 마시고 울면서 ‘죽고 싶다’고 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을 두고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는지 설명해야 했다. 나는 언제나 애인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쓰게 된 장면이어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질문을 받았을 때에야 어쩌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해서 애인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여기고 있던 건 아닐까, 하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소설 역시 화자가 사라진 동생이 자살했을 거란 공포에 싸여 있다가, 무사히 귀가하는 모습을 보고 안도하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합평은 무난하게 끝났고, 나는 그 학기의 커다란 숙제를 마친 기분이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머뭇거렸다가는 뒤풀이에 끌려갈지도 몰랐다. 합평자는 그날의 수업 뒤풀이에 무조건 참석하는 거라고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그때의 나는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했기에 그런 게 다 피곤했다. 그래서 같이 안 가냐는 사람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인 뒤 주문을 외듯 제주도, 제주도, 하면서 버스 정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버스에 타고 나서야 긴장을 풀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애인에게 수업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다시 인터넷 창을 켰다. 그사이 아까와 조금 다른 내용의 기사들이 포털 메인을 도배했다. ‘생사 불명’, ‘사망자’ 등의 표현이 곳곳에 보였다. 전원 구조는 오보였다. 350명도 오보였다. 어떻게 그런 오보가 나올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정말 그랬다. 그날 여객선 세월호에는476명이 탑승했고, 겨우 172명만이 살아남았다. 곳곳에서 낮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그날은 집에 돌아와서도 뉴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존자가 더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어 포켓’, ‘골든타임’, ‘조명탄’, ‘저체온증’ 같은 단어들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애인의 페이스북에는 더 이상 아무 사진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통화를 하면서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깨기 위해 겨우 꺼낸 말은 어떡해,였다. 그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다음 날 나는 저녁 비행기로 제주도에 가야 했다. 낮에는 조교 근무가 있어서 저녁 시간으로 잡은 것이었다. 밤새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를 지켜보다가 출근하니 사무실 공기가 무거웠다. 그날은 어딜 가도 세월호 이야기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제는 가망이 없다고 봐야 해. 저체온증 때문에 에어 포켓이 있다 해도 살아남기 힘들어. 4월 바다가 얼마나 찬 줄 알아?” 하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더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사례를 가져와 보여주었다.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이 나고 괴로웠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내고 나니 도저히 제주에 갈 자신이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제주에 가던 사람들이었는데. 함께 출발하는 일정이었다면 표를 취소했겠지만, 혼자 있을 애인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실연당한 사람처럼 울면서 택시를 타고, 공항 철도를 타고, 비행기를 탔다. 그래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해 4월은 그런 날들이었다.
그날 우리는 밤 열 시가 넘어서야 만날 수 있었다. 예민한 상태로 혼자 밤 운전을 하다가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났고, 그 일로 나는 애인을 만나자마자 화를 냈다. 네가 면허가 없어서 내가 이런 일을 겪는 거잖아, 하는 둥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 여행은 이미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애인은 여기에서만큼은 잠시 잊고 지내자고 나를 다독였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다음 날에는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했다. 식당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팽목항에서 현장 보도 중인 기자는 세월호가 수면 아래로 완전히 잠겨버렸다고 했다. 나는 전날 화낸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애인이 불편할까 봐 애써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데 몸국을 두 숟갈 정도 뜨던 애인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을 때 그가 하는 행동이었다. 왜 그러는데, 하고 다시 한 번 물으니 그는 잠긴 목소리로 아니야, 먹어,라고 했다. 계속 빤히 쳐다보자 그냥, 나는 뜨거운 밥을 먹으니까, 하고는 몸국에 얼굴을 박다시피 고개를 숙이고 다시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전날보다 차분해질 수 있었고 지금 이 사람과 있음에 안심했다. 그렇게 우리의 첫 제주 여행은 끝났다. 돈이 없어서 일정을 짧게 잡은 것이었지만,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오던 날, 고등학교 선배로부터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지혜 언니의 아버지가 세월호에 타셨다고. 돌아오지 못하셨다고. 메시지를 받고 나는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수라장인 팽목항을 떠올리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지금 연락하는 것이 맞긴 한 건지, 그럼 아무 연락도 안 하는 것이 맞는 건지, 계속 생각했지만 좀처럼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며칠 뒤에야 언니에게 이야기는 들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는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 언니는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가족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고. 언니로부터 이런저런 상황에 대해 듣고 나서는 오래전 언니를 떠올렸다. 아빠한테 엄청 깨졌다고 푸념하는 언니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언니가 정말 사랑받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언니가 절망에 빠진 모습 같은 건 조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건 언니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 후 한동안 시신 수습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 너무 많아서 수습한 시신에는 번호가 매겨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습한 시신의 특징에 대한 정보가 줄어들었고, 그마저도 추상적으로 변했다. 더 이상 생존자에 대한 희망은 없었다. 제발 살아주길 바라던 마음은 조금이라도 온전한 모습으로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주 일부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변했다. 그 참담한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래도 언니의 아버지는 곧 나오실 거라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언니의 아버지가 476명의 탑승자 중 다섯 명의 미수습자 명단에 들 줄은 몰랐다. 슬프지만 모든 사람을 찾을 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언니의 아버지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언니는 미수습자의 수가 줄어들면서 아빠의 이름이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아빠가 더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슬픔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년 전, 세월호 수색 종료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자마자 나는 언니를 떠올렸다. 그럼 언니의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건지, 장례식은 치르는 건지. 궁금한 것이 넘쳐났지만 선뜻 물어볼 수 없었는데, 다음 날 언니에게서 부고 문자가 왔다. 문자를 받기 이 주 전에 나는 언니를 만났었다. 언니는 여전히 화사했다. 화장이 진했고, 좋은 향기가 났고, 풍만한 가슴으로 나를 힘껏 안아줬다. 하지만 나는 환하게 웃는 언니의 모습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언니는 내 근황에 대해 물었고, 나는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지난 시간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여전히 괜찮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도. 언니가 물어서 대답은 했지만, 그런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어쩐지 죄책감이 들었다. 언니는 내 어깨를 쓸어내리면서, 그래도 이렇게 나아져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언니는 상담받기가 무섭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뒤로 한 번도 상담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나는 놀라서 언니, 그러지 말고 한번 받아봐요,라고 했는데 언니는 그 일에 대해 자꾸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최대한 들춰보고 싶지 않다고. 그래야 그나마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날 언니는 최근의 연애에 대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고등학생 때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언니에게서 나는 언니의 여전한 모습과, 지난 몇 년 사이 언니에게서 영영 멀어져버렸을 어떤 모습을 보았다.
돌이켜보면, 언니의 철없음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건, 그 철없음에도 언니를 향한 가족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로 인해 언니는 언제나 당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만난 언니는 고해성사를 하듯 근황을 늘어놓으면서 자꾸만 “나 좀 그렇지?” 하고 물었다. 나는 언니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죠, 하고 대답했는데, 언니는 “너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네” 하고 웃었다. 그런 언니를 보며 언니가 여전히 제멋대로였으면 좋겠다고, 망나니 같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언니를 내가 꽤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날 결국 나는 언니와 헤어지며 또 봐요,라고밖에 하지 못했다.
장례식에 다녀와서는 기운이 쭉 빠졌다. 안산까지 다녀오는 일이 체력적으로 고되기도 했고, 타인을 위로하기 위해 개인적인 슬픔을 누르느라 기운이 빠진 상태였다. 빨리 집으로 가서 내 문제로만 슬프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엎어져 울었다. 언니의 손을 잡고서 언니 밥 잘 먹어야 해요,라고 했고, 그건 진심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헤어진 애인이 전화를 걸어와서 언니를 보고 왔다고 하니 그는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약은 잘 먹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이게 정말로 효과가 있는 걸까, 하고 말했다. 계속 복용하는데도 자꾸만 괴롭다고.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나는 이제 영영 이렇게밖에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먹고 싶은 건 없는지 물었다. 그 생뚱맞음이 조금 귀찮고 짜증 났지만,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절대 죽지 않을 거라 자부했던 나를 염려하고 다독이는 게 신기했다. 그는 내가 조금 차분해진 것을 느꼈는지 장례식은 어땠냐고 물었다. 나는 장례식장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고, 그러다 보니 다시 슬퍼졌다. 그건 조금 전까지의 슬픔과는 다른 문제였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있잖아, 그래도 살아야 하잖아. 울기만 하는 날들만 이어진다 하더라도. 지금 내 모습이 이럴 줄 열여덟에는 조금도 몰랐어.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일단 살아보고 싶었을 거야. 거기 탔던 사람들, 다 그랬겠지?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맞아, 하고 말했다. 나는 오래전 몸국을 먹다가 울던 그를 떠올렸다. 그는 그냥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울컥했을 뿐일 것이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슬프지도 않던 일이 그제야 현실로 다가왔을지도. 그럼에도 나는 그때 그에게서 어떤 위로를 받았다. 그건 일종의 유대감이었다. 이 시간을 나 혼자 견디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안도. 함께 슬플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나는 느닷없이 너는 절대 죽지 마, 하고 말했다. 그는 너도, 하고 말했다.
2014년 이후로 4월이 되면 필연적으로 세월호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게 된다. 그건 언제나 괴로운 일이다. 4월은 오랫동안 얼어 있던 날이 풀리고 모든 게 생동하는 계절이어서 나도 모르게 들뜨게 되는 날이 많고,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기도 하다. 그럼에도 괴로울 수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강박적으로 모든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아놓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전히 슬픈 사람이 있다면, 잊지 말아달라는 말이 하나도 지겹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노란 리본을 보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당신과 함께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당신에게 언제나 어깨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몰라서. 그러니까 같이 울고, 함께 이 시간을 통과했으면 좋겠다. 이제 4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4월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무수히 많은 4월이 지나더라도 여전히 괜찮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어깨를 내어줄 것이다. 나 역시 잊지 않았다면서.
글: 이진선
그림: 한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