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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애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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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요희비극 Mar 30. 2020

#9

  복이와 함께 살면서도 이따금 먼 미래에 함께 살지도 모르는 강아지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 주로 다른 강아지를 만났을 때였는데, 복이와 상반된 매력에 반해서였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강아지가 복이인 것과 별개로, 이다음에는 통통한 강아지와도 살아보고 싶다거나 털이 짧은 강아지와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상상 속의 강아지는 복이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말티즈는 복이로 충분했다. 


  그런데 복이가 떠난 후 나는 하얀 강아지만 봐도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복이와 비슷한 체구와 생김새의 강아지를 보면 더욱 그랬다. 신기한 건 그런 강아지의 대부분이 하얀 푸들이었다. 우리는 목과 다리가 유난히 길고, 털이 곱슬거리는 복이가 순혈 말티즈가 아니라는 것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복이는, 조상 어디쯤에 푸들이 있고 그 유전자가 꽤 진한 ‘말티푸’일 거라고. 하지만 동물병원에 가면 별다른 질문 없이 진료카드에 말티즈라 적어줘서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복이가 말티즈든 말티푸든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우리도 편의상 복이를 말티즈로 이야기했다. 말의 힘 때문일까. 사료 표지의 단골 모델인 말티즈와 달리 털이 자라면 엉켜서 주기적으로 미용을 해야 하는 복이를 아무 의심 없이 말티즈와 더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말티푸라는 명칭 같은 건 거의 잊고 지냈다. 그러다 이제야 새삼 어떤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산책하는 푸들과 마주칠 때면, 복이는 말티즈보다 푸들과 훨씬 더 닮았었구나, 하고. 그럴 때면 전원이 나가버리 듯 멈춰 서기도 한다.


  최근에는 복이와 똑 닮은 강아지를 보았다. 강아지 입양을 알아보던 친구가 보호소에 있는 강아지 사진 몇 장을 보내주었는데 그중에 그 아이가 있었다. 소개란을 보니 ‘말티푸’라고 적혀있었다. 그래서 복이랑 닮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사진 속 강아지를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진한 갈색 털을 가진 아이였는데, 이목구비의 생김새나 체형 등이 신기할 정도로 복이와 닮아서 만나는 사람마다 보여주었다. 그때마다 사람들도 복이랑 정말 닮았네, 하고 말했다. 복이가 하얀 털을 가져서 푸들의 흔적을 보고도 당연히 말티즈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던 걸까. 복이가 갈색 털이나 까만 털을 가졌더라면 푸들이라고 했을까? 그래도 푸들하고 완전히 똑같지는 않으니까 매번 말티푸라고 했을까?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는 복이를 정말 내 멋대로 바라봤구나, 하게 된다. 그걸 어떻게 여태 못 알아봤을까. 아마 복이에게는 늘 어이없는 누나였겠지. 제 멋대로 예뻐하고, 제 멋대로 귀찮아하고, 제 멋대로 안아버리는.


  복이랑 정말 닮았지, 똑같이 생겼는데 갈색 털이야, 신기하지? 복이 없는 세상에서 복이와 관련된 일을 신기해하며 실실 웃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가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그 뒤로도 나는 종종 갈색 털을 가진 아이를 보기 위해 동물 입양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갔다. 그 아이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내주고 싶고, 건강하고 맛있는 밥을 챙겨주고 싶었다. 넓은 공원에서 뛰놀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애플리케이션을 삭제했다. 그 아이를 그 아이로만 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내 멋대로 복이를 투영해서 보고 있으니까. ‘복이랑 닮아서’는 그 아이를 위한 마음이 아니니까. 애플리케이션을 삭제하고 다시 사진첩을 열어 복이 폴더에 들어갔다. 계절이 바뀌어도 최근 사진은 여전히 그 날에 멈춰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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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진선

그림: 한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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