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밀양> 리뷰
밀양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언어였다. 신애(전도연)의 선택은 번번이 무력화된다. 용서하려 했을 때 가해자는 이미 신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고, 종교를 비웃기 위해 건넨 유혹은 끝내 실행되지 못한다. 그녀의 언어는 작동하지 않는다.
반대로 밀양(혹은 세계)의 언어는 잔혹하다. 밀양은 다 똑같이 사람이 사는 동네이며, 일방적으로 정상으로 돌아오라 윽박지르기도 하고, 일방적으로 구원을 위한 기도회를 열지만 그것이 신애를 대변하는 언어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폭력이다.
한 개인에게 가닿을 수 없는 보편적인 언어, 그것이 세계 언어의 폭력성이다.
이러한 폭력성을 보여주는 예시는 종찬(송강호)의 부담스러운 정도의 구애가 있다. 특히 가장 좋았던 장면 역시 종찬과 신애의 관계다. 거의 미쳐버리기 직전의 신애가 종찬에게 관계를 나누자고 하는 장면에서 종찬이 '제발 정상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하지만, 신애가 정상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아니, 도대체 정상이란 게 무엇인가?
이처럼 우리가 가볍게 뱉는 언어, 그것이 주술적인 의미(성경)에서건 일상적인 의미(밀양이 어떤 곳이냐, 다 사람 사는 곳이다)에서건 신애를 대변하는 언어가 될 수는 없다. 나아가 이러한 표현조차 박탈당한다. 신애의 주체적인 언어(용서하기 위해 면회를 가거나, 육체적으로 집사와 종찬을 유혹한다)는 모두 실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애가 주체성을 가지고 언어를 뱉으면 신애의 말처럼 그렇게 되는 장면 역시 존재한다. 인테리어를 바꾸라는 조언(후에 장사가 잘 된다.)이나 극단적 선택을 결심하고 손목을 그었지만 '살려달라'고 말하니까 실제로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때의 살려달라는 단순히 목숨을 살려달란 게 아닐 것이다.)
물론 정확히 반대도 존재한다. 아들을 돌려달라는 납치범을 향한 호소는 철저히 무시당한다. 그것은 거짓말(잘 사는 척)에 대한 벌인가? 어느 모로 보나 알 수 없다. 그리고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영화를 작동하게 하는 윤리다.
다분히 폭력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무의미하기도 한 이 애매함 속에서 신애는 주체성을 미약하게나마 획득한다. 그것이 누군가의 집에 돌을 던지는 타락의 모습이건 미용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원수의 딸과 마주하지 못해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것이건 말이다.
이 곁엔 역시 종찬이 있다. 밀양에서의 신애를 관찰하고 쫓는 종찬이 결코 유쾌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애를 위해 거울을 드는 것, 사실 이미 잘 받쳐져 있는 거울이라 딱히 큰 의미는 없는 행위. 이 무의미하고도 무해함이 종찬의 최선인 것이다.
결국 아수라장과 같은 일련의 사건이 휩쓸고 간 다음엔 신애와 종찬, 혹은 미약하게나마 각 인물 간의 관계가 남았다. 정신병동에서 사회로 복귀해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신애,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거울을 들어 신애와 마주 서는 종찬, 이 관계가 정상적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구원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남는 것은 해석도, 정상도 아닌, 설명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는 삶이다.